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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소개 논문집
   
  [Architecture-건축] 현대교회건축-조경 의의 예배와의 관계
  글쓴이 : 온돌북경운…     날짜 : 08-05-26 17:02     조회 : 8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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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건축-조경 의의 예배와의 관계

1. 교회건축-그 지상과제

현재와 같은 교회당 건축에 대한 이상 현상은 분명 병든 교회(목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기준이 있다. 기본적인 예배 처소와 시설을 싸잡아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건축을 했거나 현재 건축하는 교회들의 거의 대부분이 빚을 안고 건축한다는 점에서 병든 교회(목회)라는 지칭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빚은 고스란히 하나님의 몫이다. 왜냐하면 교회를 목회자나 신자 중 어느 개인의 소유로 하지 않고 모든 교회들이 공히 ‘주님의 몸 된 교회’로 혹은 ‘하나님께 봉헌된 교회’ 임을 부각해서 헌금을 하게하여 건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당 건축 빚은 결국 거룩한 하나님을 빚쟁이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 모욕적인 행위인 것이다.

어느 교회는 신자의 숫자와 재정 규모를 감안하여 “몇 년 정도면 빚을 갚을 수 있겠다”는 계산 하에 건축을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계산대로 모든 빚을 상환한다지만 그 몇 년간의 왜곡되고 빗나간 교회적 사명은 무엇으로 보상하랴. 왜냐하면 교회당 건축이 교회의 사명이거나 목회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언급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어느 목회자는 교회당 건축에 매달리다 쓰러져 몇 달간 입원해야 했고, 어느 교회는 건축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 신자들이 두세 갈래로 갈라져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가하면 건축하고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이자와 원금의 일부를 갚아 나가는 교회도 있다. 그 교회 목회자는 피골이 상접해서 하는 말이 “미쳐 죽을 지경이다”라면서 하루하루가 돈(빚)과의 전쟁이라 했다.

목회자의 모든 관심이 “이번 주에는 헌금이 얼마나 나올까”에 집중되고, 간혹 전도를 받고 새로 나오는 사람을 보면 우선 헌금을 얼마나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분석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목회란 이런 게 아닌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다른 목회자는 건축 빚을 감당 못하고는 야반도주하고, 교회 건물은 경매에 붙여지고…

그런데도 한국 교회들이 교회당 건축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교회당 건축이 곧 목회성공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이 착각은 수십 년간 전통이 되어 ‘가장 의미 있는 일’ ‘평생에 한번은 건축해야 축복’이라는 등의 왜곡된 포장 탓에 재고해 볼 여지도 없이 붐이 되어 몰아닥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웅장한 교회당 건물은 ‘축복’이라고 언급하기에는 섬뜩한 야유와 비난의 돌이 되어 지금 한국 교회를 향해 무차별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러한 교회당 건축 신드롬에는 “건축하면 사람들이 모인다.”는 사기성 심리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2. 건축 대신 해야 할 일

이러한 한국 교회의 왜곡된 교회 건축에 대한 이상 현상 속에서도 몇몇 교회(목회자)들은 그에 한 눈 팔거나 물들지 않고 교회적 사명에 열중하는 천연기념물적인 교회들이 몇 있음을 안다.

이름하여 ‘깡통교회’ ‘천막교회’ 그리고 중.고등학교에 체육관을 지어주고 그 체육관을 주일에 예배처소로 이용하는 교회들 말이다.

또는 교회 건물도 없이 걸인들, 노숙자들과 더불어 길거리에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특별한 사역도 눈에 띈다.

만약,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천문학적인 비용을 최소한의 예배처소를 마련하는 데만 사용하고 나머지를 사회를 위해, 불우한 이웃을 위해 과감히 베풀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미련함과 몰이해 때문에 교회를 적대시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교회는 부끄러움 대신 당당하게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교회 양심상 그럴만한 체면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부의 축적과 부동산 투기, 고급스런 레저 활동 등 몇몇 중대형 교회와 상류층 목회자의 문제일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든 교회와 목회자를 동일한 시각으로 본다.

그러나 교회당 건축과 관련해서는 크고 작은 교회가 따로 없이 현재의 비난에 대한 책임에서 예외일 수 없다.

경쟁적으로 건축에 올인 하는 모습이 비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교회가 잘 된다”는 일종의 사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신자의 돈을 갈취해서 목사만 배불린다.”는 비판으로 쏟아진다. 실제로 필자가 잘 알고 지내는 어떤 이와 대화중에 들은 항변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무조건 건축’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건축할 비용으로 주님이 본을 보여 주시고 분부하셨던 섬김과 베풂의 사역에 활용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평양대부흥100주년기념’을 외치며 그 부흥운동의 이 시대 재현을 강조한들 체육관 속에서만 울려 퍼지는 메아리에 그칠 뿐이다.

이제 교회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아름다운 구원의 메시지를 사랑에 담아 세상에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본연의 모습으로 말이다. 혹, 이것이 지나친 욕심이라면 최소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교회나 신자들의 모습이 못하다는 비난은 받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편 가운데 하나가 교회당 건축에 대한 자제다. 교회당 건물이 필요 이상의 규모나 감당할 수 없는 건축 비용을 “오직 믿음으로”라는 자기 최면만 가지고 밀어 붙이는 무모함은 내버려야 한다.

필자가 미국의 유명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로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지만 정작 출석하는 교인은 백여 명에 불과하고, 연간 5만여 명의 관광객만 다녀간단다.

지금 한국 교회가 눈에 불을 켜고 건축하는 건물들도 지금 같은 성경에 역행하는 목회와 교회 성장의 정체 상태라면 아마도 얼마 가지 못해 관광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아니면, 주님이 곧 재림하셔서 휴거가 된다면 ‘아뿔싸~!’ 그 억울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차라리 건축할 비용과 시간과 노력으로 이웃을 섬겼더라면 더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었을 것이 아닌가.

교회당을 건축했다 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교회에 등록하는 경우는 생각처럼 많지 않다고 한다. 아니, 지금 같은 우리나라의 기독교 성장 추세에 비춰볼 때 아예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건축했더니 하나님이 채워주셨다”거나 “부흥됐다”는 이야기를 가끔은 듣게 되는데, 그 채워진 대부분의 신자들은 다름 아닌 주변의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 신자들, 혹은 떠돌이 철새 신자들이다.

몇 년 전 8백 명 정도 모이는 중형교회가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교회당을 건축했다. 담임목사의 공언처럼 호텔 급의 시설이었다. 그리고 1년 후, 그 교회는 ‘교회부흥을 기념하는 축제’라는 이름으로 2주간에 걸친 대대적인 행사와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부흥이라는 말은 빛 좋은 개살구로, 실상은 주변에 있던 2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신자들 절반이 그 교회로 옮겨간 것이라 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교회의 신자들이 주님께 매료 되서가 아니라 건물과 시설에 매료되어 하나 둘 등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필자와 친분이 있는 그 교회에 다니는 중직자의 증언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영적 권위를 실추시키고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 밖에 얻는 게 없다. 주님이 기뻐하실까? 시설보고 쫒아간 사람들이 은혜생활, 신앙생활에 진실할 수 있을까? 십중팔구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만큼 교회와 신자들이 세속화 되어 보암직하고 먹음직해 보이는 것만을 쫒는 인본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몇 해 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도발적인 서적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 교회는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건축에 매달리지만 정작 교회를 죽이는 꼴이 되어 버린 것 이다.

물론, 건축이라는 한 가지 사항이 교회가 비호감이 된 유일한 주범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부정적인 요인들이 정도에 지나친 건축물로 보여 지고 증거로 남는 상황에서 당연히 문제제기의 주범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 건축의 녹화

본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환경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그러나 특히 지난 수 세기동안 급속히 진행되어 온 산업화와 그에 따른 도시화 현상으로 그 동안 수많은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이 도시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파괴하고 그 자리를 인간이 만든 건조물들로 대체시킴으로써 인간의 환경을 물리적으로 오염시키고 인간을 감정적으로 메마르게 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환경오염을 전 세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로 만들었고, 결국 자연환경의 회복이 미래사회가 해결해야할 가장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의 회복은 세계적 또는 국가적 차원의 대책과 함께 사회적 인식의 대 전환을 요구하며, 이는 또한 함께 사는 지구촌의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환경문제를 다루는 여러 NGO 단체들이 이미 자연환경의 보존 내지는 회복을 위하여 범세계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연 환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 기독교가 그 보존을 위해 앞장 서야할 책임이 있으며, 마땅히 교회가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교회당 건물도 자연환경 보존에 대한 관심 속에 건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화 과정과 함께 발전되어온 현대건축은 일찍부터 소위 생태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자연환경보존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건축에 사용되는 재료에 대한 문제로부터, 자연 에너지인 태양열을 활용하는 문제와 자연을 보존 내지는 회복시키는 문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건축에 사용되는 재료의 문제는 자연의 재료인 흙이나 목재, 돌등을 사용함으로서 주위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꾀하고 그 자체를 자연적인 쾌적한 환경을 만들고자 함이며 동시에, 수명을 다한 건축물의 폐기 시 그 재료들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거나 재사용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태양열 에너지의 문제는 현대건축물이 난방을 위해 주로 사용하는 석유에너지를 절약함으로써 인류 미래의 에너지원의 고갈을 대비하고자 함이요, 나아가서 에너지 사용으로 인한 심각한 대기 오염을 줄여보고자 함이다. 자연환경의 보존 및 회복의 문제는 특히 도시에서 건축과 조경 디자인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나라의 도시 건축은 높은 지가(地價)로 인하여 대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이는 필연적으로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건축면적을 확보하는 방안이 연구되는데다가, 최근 주차장의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건물을 배치하고 남는 땅도 주차장으로 활용되기 일쑤여서 실제로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땅은 거의 남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나마 법은 대지의 일정비율의 면적에 식수 등의 조경을 하도록 강제하고 있으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건물과 자동차를 위한 공간이 확보되고 난 연후에 남는 땅에 나무를 심는 현실에서 거의 형식적인 나무심기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 자연 특히 나무가 우리 인간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간과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환경의 가치를 인식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대지의 효율성과 환경의 쾌적성 사이에 균형을 추구함으로서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건축의 다양한 디자인 아이디어들은 대지의 최대의 효율성과 함께 자연환경의 복원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한 극단적이며 성공적인 아이디어는 건물의 옥상을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대지로 조성함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케빈 로쉬가 설계한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있는 오클랜드 박물관은 건물의 지붕 높이를 다양하게 구성함으로서 단 차이를 이용한 실내의 채광과 환기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전체의 대지를 계단형의 공원으로 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케빈 로쉬 설계의 또 다른 예는 뉴욕에 있는 포드재단 본부 건물인데, 여기서 그는 유리로 덮인 옥내에 거대한 온실을 만들어 숲을 조성함으로서 건물의 로비를 공원화하였다.

최근 생태건축을 실험하는 건축가들의 제안은 보다 더 과감하다. 이는 건물 자체를 자연의 일부로 만들어 내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아르헨티나 출생의 건축가 에밀리오 암바즈는 특별히 생태건축가로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 각국에 작품을 남겼다. 일본 후쿠오카의 아크로스 후쿠오카 건물에서 그는 공원에 면한 벽면을 계단화하여 이를 거대한 계단공원으로 조성하여 도시의 녹색공간을 확대하였다.

또한 그는 텍사스 오스틴의 변두리에 위치한 쉬람버거 컴퓨터 연구소 설계에서 건물을 일련의 작은 건물들로 나누어 배치하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자연을 복원함으로써 주변의 아름다운 녹색 공원과 대조되기보다는 그 경관의 일부가 되도록 하였다.이러한 방법은 에너지를 절감하는데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특히 땅이 비좁은 우리나라의 교회당 건축에서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의지를 가진다면 비록 작지만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조경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건축물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살아있는 한 그루의 나무만 같지 못하며, 건물만으로 조성된 환경은 메마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의 건축물은 적절한 자리에 적절한 크기와 모양의 나무와 함께 어우어질 때 그 아름다움이 온전히 살아날 수 있으며, 참으로 좋은 환경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나무는 대기의 오염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서를 순화시켜준다. 나무는 건축물의 외부공간을 쓸모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교회에서 한 그루의 나무 밑은 쉼터이며, 친교를 위한 만남의 장소이며, 교회 교육을 위한 공과공부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그 동안 예배당 위주로 건축되던 교회당이 최근 들어 교육과 친교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교실과 친교실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고 있는 데, 나무가 잘 가꾸어져있는 외부공간이 방으로 구획된 친교실이나 교실보다 어쩌면 더 효과적인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벽돌로 쌓아 만든 담장은 이웃 주민들에게 교회를 지역 사회와 단절시키는 심리적 부담을 줄 것이다. 벽돌담 대신 나무 울타리를 만들면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줄 것이고, 나아가서 울타리 자체를 없애고 경계를 해체하여 수목을 적절히 배치하고 의자를 설치하면 교인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의 쉼터가 될 수 있다.

교회당 옥상을 잘 활용하는 것은 부지가 좁은 도시 교회에서는 필수적이며 따라서 옥상 조경은 교회 건축에서 매우 중요하다. 옥상에 나무를 심기 위해서는 흙을 덮어야 하고 그 흙은 건물의 구조에 막대한 짐이 되기 때문에 건축 설계 시에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옥상 조경은 옥상의 활용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건물의 구성에 따라서는 여러 개 층에 크고 작은 옥상이 생길 수 있고 이들 모두에 적절한 조경계획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교회당의 중요한 형태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 나무들과 함께 어울어진 교회당 건물은 지역환경을 더욱 친근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최근 우리 교회들이 지역사회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열린 교회를 표방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는 데, 이는 목회의 비젼이며 지역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의해 수행되겠지만, 건축의 형태와 공간적 뒷받침이 있어야 의도한 바를 이룰 것이며 수목에 의해 풍요로워진 건물은 더욱 효과적인 교회사역의 도구가 될 것이며, 심각하게 파괴되어가는 자연을 회복시키는데 작으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예배와 교회건축

교회건축은 예배를 포함하여 교육, 선교, 친교, 봉사등 교회의 다양한 활동들을 위한 공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중에서 예배는 교회건축의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기능으로, 교회 활동의 중심이며, 동시에 출발점이기도 하다.

교회 모든 활동들이 세속적 활동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예배는 더더욱 특별한 목적과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인간은 환경적 영향을 특히 강하게 받는 존재로서, 예배환경인 교회건축 공간은 예배의식의 진행과,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 회중, 회중과 회중간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수도, 또는 그 관계를 더욱 촉진시킬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건축에서 예배공간은, 예배의 목적, 예배의식의 과정과 내용 등, 예배중에 행하는 모든 활동들과 그 의미에 적합한 장소와 환경으로 구성되기 위하여, 예배공간 설계는 예배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즉, 예배학과 건축학의 만남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1. 예배의 내용과 건축적 문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만남으로 설명된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시고, 그의 백성은 찬양과 감사와 기도로서 응답한다. 즉, 예배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선포'와,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다른사람과 '교제'하는 나눔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주로 설교자의 소리를 통해 인간의 언어로 이루어지며, 이때 회중은 청중으로서, 설교자의 소리를 듣고, 말씀을 깨달아 마음으로부터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의 소리를, 감정적 표현과 함께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회중에게 전달할수 있도록 하는데는, 예배실의 건축적 음향설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 예배실의 크기 즉, 회중의 수에 따라, 전기적 음향설비의 보완이 요구되기도 한다. 또한, 말씀의 전달은 음향적 문제외에도 설교자와 회중사이의 거리나, 위치, 방향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는 예배실 공간의 배치문제이다. 회중이 설교자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가, 설교자의 전면으로 길게 정렬하여 있는가, 회중들로부터 설교자의 위치는 전면인가, 측면인가에 따라 물리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헌신'은 여러 가지 행위와 의식으로 이루어진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악기소리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음악으로, 역시 예배실의 음향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때의 음악은 설교자의 소리와는 그 성격이 달라, 전기적 방법으로 전달되는 기계음이 아닌, 생생한 원음의 전달이 요구된다. 또한, 음악은 실의 형태와 마감재료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찬양도, 예배실의 특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성가대 또는 개인의 찬양과 회중이 함께 드리는 찬양은 그 음향적 조건이 매우 다르다. 즉, 성가대의 찬양은 부르는자와 듣는자가 구별되지만, 회중의 찬양은 이 구별이 없다.

감사의 한 의식인 헌금은 행동을 수반한다. 교회에 따라 예배 전에 헌금하기도 하고, 설교후에 그 응답으로서 헌금하기도 하지만, 정해진 행위의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행위 의식은 헌금위원의 수, 봉헌행렬, 그리고 봉헌기도 등의 행위 등에 따라 그에 적절한 공간적 배치나 구성을 요구한다.

'나눔' 즉 교제의 예배도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부분 개신교에서 이루어지는 주일 예배중의 나눔은, 예배순서중 새신자에 대한 환영이나 성도간의 인사순서로 이루어지는데, 대체로 지나치는 형식적인 순서에 불과하다. 이는 나눔의 방법문제 이기도 하지만 회중석의 배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드리는 의식을 위한 회중석의 배치와 나눔을 위한 회중석의 배치는 반드시 불일치 하는 것일까? 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례전을 통한 나눔은 일정한 행위를 수반하는 예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배공간은 그 행위의 흐름에 거스림없이 배열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예배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내용들은 각각 서로 다른 특성과 양태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순서가 다 중요하나, 일정한 형식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어야 온전한 예배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예배를 하나의 극화된 예술로 표현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예배공간 또한 예배의 모든 행위들이 그 목적에 적합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기능적 공간 이어야 하면서, 전체가 하나로 통합된 예술적 공간 이어야 한다.

2. 예배공간 구성의 기본원칙

다양한 참여자와 그 기능들을 위한 각각의 예배공간들은, 하나의 전체 예배공간으로 조화롭게 통합되어야 한다. 예배공간의 조화로운 통합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기본원칙을 바탕으로 이루어질수 있다.

1) 개별성

소리로서 전달되는 말씀 선포의 설교와 음악으로 이루어지는 응답의 찬양, 행렬 예식으로 이루어지는 성례 등, 각각의 기능 공간은 그 개별적 목적과 의미 그리고 행위에 적합하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2) 통합성

각각의 공간들은 중심을 가진 하나의 전체로 통합되어야 한다. 이때, 상호 배치되는 기능들은 그 중요도의 위계에 따라 적절히 조절되거나, 보완됨으로써, 동시에 만족시 킬수 있는 건축적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렇게 통합된 공간은 그 공간조직의 질서가 단순 명료함으로써, 예배에 참여한 회중들을 심리적으로 예배의 목적 속에

안정되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3) 효율성

공간의 효율성은 공간의 위치, 크기, 상호관계 및 공간내 가구 배치에 따른 동선, 접근성 등과 관련된다. 지나치게 큰 강단은 예배공간을 압도할 것이고, 지나치게 작은 강단은 중심성을 상실할 것이다. 또한, 불합리한 동선은 예배의 진행에 장애가 될 것이며, 불필요한 장치물 들은 회중의 시선을 산란시켜 집중성을 약화 시킬 것이다.

4) 통일성

공간형태의 구성 방법이나, 건축 재료와 각종 예배도구들, 조명기구와 스피커를 포함한 예배공간내 모든 시각적 대상물에 대해 통일감 있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5) 예배공간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제1의 원리는 조화이며, 조화는 질서로부터 시작된다. 질서는 전체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이 자기표현을 가지며, 동시에 전체 중의 일부로서 작용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공간적 형태의 조화, 재료의 조화, 가구, 즙기들의 조화, 색채와 질감의 조화 등, 모든 구성요소들이 함께 하나의 질서원리에 의해 통합될 때 아름다운 예배 공간이 탄생될수 있는 것이다.

결코 고급스럽고, 호화스러운 치장에 의해 아름다움이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6) 건축공간의 친밀감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며, 예배는 바로 그 공동체의 만남과 나눔이기에, 회중을 압도하거나, 회중 자신과는 무관한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의 공간은 회중으로 하여금 부자연스럽게 하고, 예배에 초대된 손님이 되게 할 것이다.

7) 융통성

교회의 변화, 세대의 변화, 지역문화의 변화에 따라 예배는 항구적이나, 이를 표현 하는 외형들은 변해갈 것이다. 교회건축은 이 예배의 외형적 변화에 적응해 갈 수 있는 융통성을 가져야 한다. 다만 변화의 예측이 필요하다. 보다 정확한 미래에의 예측과 그에 따라 미리 계획된 적절한 융통성은 건축물의 수명을 그만큼 연장시킬 것이다.

8) 가변성

예배공간은, 면적으로는 교회건축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나, 사용 시간이 극히 제한된 공간이다. 공간을 몇 개로 분할하거나 통합 할수 있는 가변성을 연구 함으로써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킬 연구가 필요하다.

9) 독창성

인간의 창조적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예배공간의 독창적인 구성은 예배 공동체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 줄 것이며, 소속된 교회에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하나의 동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예배공간은 회중에게 예배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예배의 형식과 모양을 규정할수 있는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잘못된 교회건축은 예배를 포함한 교회의 활동을 제약하고 위축시킬것이며, 훌륭한 교회건축은 예배공동체에 새로운 활력과 가능성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건축은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게 하는데 공헌 할 것이고, 공동체 해체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재와 미래 사회의 고독한 이들을 교회로 불러 모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하는 1차적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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