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온실건축에 이용된 온돌의 독창성과 과학성
조선시대에 이미 서양보다 150여년 앞선 온돌온실이 있었다.
온돌하면 흔히 방에만 쓰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비주거와 타용도에 온돌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춥고 긴 겨울을 갖고 있으며 남으로는 바다가 북으로는 산적과 토비들이 득실거리고 있어 지역을 벗어나서 살아가기 어려운 조건이다. 따라서 유럽이나 중국처럼 추울때에 따뜻한 곳의 과일이나 채소를 가져오거나 더울때 서늘한 곳으로 이동하여 살수가 업는 특성으로 인하여 예로부터 건축에서도 자연환경을 가능한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실내에서 생활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이루고자 하였다. 우리나라 전통건축물의 재료 및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구조재는 목재를 이용하고, 벽체는 주로 황토와 볕짚 같은 친환경 재료를 이용하여 외부환경을 차단하는 벽체를 구성하며 바닥에는 구들을 놓아 불을 때서 부족한 난방열을 공급하였다. 이 때 온돌에 사용하는 장작과 같은 난방재료는 공급열의 다소를 조절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번에 과대한 열이 실내에 공급되지 않고 실내온도가 적절히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닥의 구들이나 벽체는 충분히 두꺼운 구조로 구성되어 실내온도의 변화폭을 일정온도 범위 내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내온도를 유지하였다. 또한 창호 및 문에는 한지를 이용하여 바람은 차단하면서 자연채광이나 일사의 일부분이 실내로 유입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건축방식은 주로 주택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자료에 의해 이와 같은 온돌시스템이 주택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 동절기에 채소를 기르기 위해 온실건축에도 활용된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온실 건축에 대한 고찰
조선온실 건축
조선온실은 1450년 의관(醫官) 전순의(全楯義)선생이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에 기록된 온실건축부분의 기록대로 당시 궁중의 꽃과 정원을 관장하는 관청인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했던 500년 전의 옛 온실건축을 재현하면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산가요록의 자료를 살펴보면 산가요록의 식품부분 중간에 동절양채(冬節養菜)라는 작은 제목이 있고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집(온실)을 짓되 크고 작음은 임의대로 한다. 삼면은 막아 쌓고, 기름종이를 바른다. 남면은 전면에 살창을 내고 기름종이를 바른다. 바닥에 구들을 만들되 연기가 나지 않게 한다. 그들 위에 흙을 한자반 정도의 높이로 쌓고 온갖 봄채소를 재배할 수 있다. 저녁에는 바람이 들지 않게 하며 천기가 극히 차가운 즉, 두텁게 비개를 엮어 살창을 가린다. 날씨가 따뜻하면 철거하고 매일 물을 이슬같이 뿌려준다. 방안은 항상 온화하고 윤기가 있게 하며 흙이 마르지 않게 한다. 또 이르기를 밖에 가마솥을 걸어 조석으로 솥에서 나는 습기를 벽안으로 끌어 방안을 훈훈하게 한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이 건축물은 기능면에서 오늘날의 온실과 일치한다.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나오는 움집(土宇)과는 가온(加溫)을 하였다는 점에서 구별이 되나 때로는 움집과 혼용하기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명종 7년(1552) 1월 12일자의 실족을 보면 “겨울철에 꽃을 기르는 토우(土宇)와 시목(柴木)의 역사(役事)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시달린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곧 움집이 가온을 하지 않았다면 시복에 대한 언급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산가요록의 편찬연대를 그가 편찬에 가담한 의방류취[醫方類聚](1445)와 유사한 시기로 본다면 대략 1450(세종 32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는 화란의 무이젠버그가 쓴 온실의 역사(history of green house)를 보면 유럽에서는 1619년경이며 난로(stove)로 가온하였다는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전순의의 온실은 이보다 약 170년경 정도 앞선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복원된 조선온실 건축
이와 같은 산가요록의 자료를 토대로 (사)우리문화가꾸기회가 농림부, 문화관광부,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2002년에 경기도 양평에 복원을 하였다. 전체적인 규모는 면적이 약 60㎡로 전면이 10m, 측면이 6m, 높이 0.6~2.0m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건축방법은 자료에 나와 있는 대로 삼변에 황토담을 약 30cm 두께로 쌓고 남쪽엔 한지에 기름을 바른 창들을 경사지게 달아 햇볕을 투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그림 1). 또한, 바닥에는 구들을 설치한 후 약 40cm의 두께가 되도록 흙을 쌓고 그 위에 목재를 대고 45cm의 흙을 깔아 채소를 심을 수 있도록 하였다(그림 3).
그림 1 복원된 15세기 조선온실 건축의 전경
그림 2. 복원된 조선온실 살창
그림 3. 조선온실의 내부 구조
북측면의 온실 벽과 맞붙여 주택의 부엌구조와 유사하게 불을 때어 구들 및 밑바닥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부뚜막을 설치하였고 온실이 있는 고래 쪽으로 가열된 열기가 통과하여 남쪽의 양측에 있는 굴뚝을 통하여 연기가 배출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부뚜막위에 솥을 걸고 불을 때어 물이 끊으면 온실안과 연결된 연결구를 통하여 잠열을 갖고 있는 수증기가 온실내로 유입되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하였다(그림 4).
그림 4. 수증기가 유입구를 통해 온실내로 유입되고 있는 모습
조선온실건축에 사용된 온돌의 구성
우리나라 온돌난방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신석기시대에는 냇돌이나 할석, 점토대를 두른 노(爐)가 주거지 중앙에 나타나며, 청동기 및 철기시대 초기에 들어 취사와 난방용으로 爐가 2개 이상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철기시대 초기 및 삼국시대 초기에 들어 중앙의 爐는 하향식으로, 그리고 벽 쪽의 취사용 爐는 부뚜막 형태로 정착된다. 이러한 형태는 삼국시대 및 고구려 시대에 들어 취사와 난방이 결합된 전통온돌의 형태인 ㄱ자형 구들로 합쳐져 남쪽으로 전파되며, 고려시대 중기에 들어 아궁이가 방 밖으로 나가고 방전체 온돌이 정착되게 된다.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1399)에 의하면 객관(客館), 학교, 역원(驛院)에는 일찍부터 황해도부터 제주에 이르기까지 온돌 난방방식이 채용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상류사회에서도 난방법으로 사용하게 된 온돌은 인조왕대에 와서 국가가 정책적으로 온돌의 보급을 장려하고 있다. 온돌방에 장판을 한 기록은 조선 초기부터 발견된다.
그림 5. 지방별 온돌구조 평면도 및 단면도
그림 6. 고래의 형식 평면도
조선시대의 부엌은 방바닥에서 2.5~3자를 낮추어 바닥을 만들고 이 바닥에서 1.5자 내외로 부뚜막을 만드는데 부엌의 바닥을 낮추는 이유는 불길이 방고래로 잘 들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궁이에서 방고래로 급경사를 이루다가 약간 낮아지는 부넘기가 있는데 이는 불길이 잘 넘어가고 불이 거꾸로 내지 않도록 해준다. 부넘기에서 굴뚝이 있는 개자리까지는 약간씩 경사지게 되고 경우에 따라 구들장을 놓을 때도 약간씩 경사를 두게 되어 아궁이쪽이 약간 낮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불길이 고래에서 굴뚝으로 연결되기 전에 고래보다도 깊게 파여진 골이나 웅덩이가 있어 재나 연기가 일단 머무르게 하는 개자리가 있으므로 여기서 굴뚝으로 연결되어 굴뚝 밑에 개자리를 하나 더 둔다.
그림 7. 온돌의 구조 개요도8)
결 론
최근에 발견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자료에 의해 조선시대에 동절기에 채소를 기르기 위해 온실건축에도 온돌이 활용된 사실이 밝혀졌다. 주거용으로 개발된 온돌을 과감히 농사에 도입하고 흙이나 한지와 같은 평범한 재료들을 온실에 적합한 소재로 활용하였다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산가요록에 따라 복원된 조선온실은 태양복사열이 기름을 입힌 한지의 투과체를 통해 태양복사열이 온실내로 투과된 후에 실내 바닥 및 황토 벽체에 흡수된 후 장파장의 복사열로 바뀌게 되면서 한지를 통해 다시 투과하여 나가지 못하게 됨으로써 온실내의 온도가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는 일사만을 이용하여 충분히 온실내의 온도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루에 2차례 2시간씩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서 부족한 열량을 온돌을 통하여 공급하였으며, 한편 낮에 투과된 일사열에 의해 실내가 과열이 되는 경우에는 기름한지를 바른 살창을 열어 식물이 생장하기에 양호한 온도조건이 유지되도록 하였다.
특히 비닐온실과 한지온실에 대한 온열환경성능을 비교해 본 결과, 조선시대의 온실이 오늘날의 온실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시설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실험결과 산가요록에 따라 복원된 조선온실은 태양복사열이 기름을 입힌 한지의 투과체를 통해 태양복사열이 온실내로 투과된 후에 실내 바닥 및 황토 벽체에 흡수된 후 장파장의 복사열로 바뀌게 되면서 한지를 통해 다시 투과하여 나가지 못하게 됨으로써 온실내의 온도가 상승하는 온실효과 현상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지온실이 일사가 실내로 투과되어 실내온도를 상승시키고 식생이 성장할 수 있도록 온도를 유지하면서 보온을 하는 온실로서의 기능을 뚜렷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또한, 한지온실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비닐에 의한 온실모형 공간과 한지에 의한 온실모형 공간을 소규모로 제작하였다.
한지는 통기성(공기 및 수분 투과성), 유연한 접힘, 강인성 및 빠른 흡수성, 그리고 보온성 등이 비닐에 비하여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본 조사 및 실험을 통해 비닐온실과 한지온실에 대한 온열환경성능을 비교해 본 결과, 조선시대의 온실이 오늘날의 온실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첨단 영농시설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후 기】
* 본 논문은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004년 12월에 게재된 “15세기 조선온돌건축의 기능
및 실내환경 특성에 관한 연구”를 일부 재정리한 것임
** 본 논문 발표에 도움을 주신 (사)우리문화가꾸기 관계자분들과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조동우책임연구원과 함께한 연구진께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문헌
1. 김영진, 농상집요(농상집요)와 산가요록(산가요록), 조선초 과학영농온실 복원기념 학술심포지움 논문집, 한국농업사학회․(사)우리문화가꾸기회, 2002. 3. 30
2. 김용원(2002), 복원된 조선초기 과학영농 온실의 실증적 고찰, 조선초 과학영농 온실복원기념 학술심포지움 논문집, 한국농업사학회․(사)우리문화가꾸기회, 2002. 3. 30
3. 이호철(2002), 산가요록의 ‘동절양채’ 농법과 온돌, 조선초 과학영농 온실복원기념 학술심포지움 논문집, 한국농업사학회․(사)우리문화가꾸기회, 2002.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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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선우, 한국 주거난방의 사적고찰-온돌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지, 1979. 10
10. 여명석 외, 전통온돌이 시대적 변천과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19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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