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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건축과 온돌의 영성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6-06-05 01:39     조회 : 644    
   서양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hwp (10.0K), Down : 1, 2016-06-05 01:39:26
한국건축과 온돌의 영성
김준봉
가. 들어가는 말

집이란 무엇인가?
건물은 그릇이지 내용물이 아니다. 그러나 집은 사는 사람을 나타낸다.
새집 개집 개미집 아기집 집안 가문

나. 한국건축의 영성

1) ‘아름다움’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신자들이 보는 아름다움 과 비신자들이 보는 아름다움
 미적인 관점에서 고딕성당은 어떤 교회건축보다도 우월한 부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임과 동시에 당시의 건축예술의 총화라고 얘기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의 관점은 아니다. 만약 영성의 관점에서도 고딕성당의 우월함이 성립한다면 풍부한 상징과 장식이 있는 화려한 부자들의 교회가 가난하고 초라한 교회보다 더 풍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화려하고 사치한 것은 왕궁에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고 묻는다. (눅 7:25) 성경에서 부요함은 항상 생명의 말씀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중세의 화려한 문화적 유산은 예술적으로는 인정되나 신앙적으로는 잘못된 것이었다. 기독교의 진리는 말씀을 통해 전달되었으며 기독교가 말씀의 능력을 잃으면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가 없다. 교회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신앙적 노력을 기울이는 현상은  항상 말씀의 능력의 상실과 함께 일어난 일이며, 다른 것을 통해서 그 빈자리를 보상하려는 노력은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영혼의 갈증은 상징이나 예술적인 조화로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건축에서 아름다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자연과 조화 그리고 지속가능함에 있다.
집이 작은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안빈낙도
저탄소 저에너지를 추구하는 배려하는 건축===한옥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노력이 종교적인 열심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교회 건축의 아름다움은 일반 건물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공간미나 조형미, 단순미, 조화미등 여러 가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미적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들-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만이 아닌-성도들의 교제와 활동의 모습에서,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와 성도간의 아름다운 교제를 하고 이웃을 섬기는 모습에서 교회의 참 아름다움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고 이들이 모이는 장소는 청결하고 위생적이고 검소함에도 충분이 아름다움을 발산할 수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강조해야한다.

2) 공간의 활용과 자원의 효율성을 재고해야 한다.
 한옥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집
그러나 또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집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는 건전한 자본주의 이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건전한 자본주의라 함은 자본은 충분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이지만 그 사용이나 분배에 있어서는 사랑과 효율이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가 교회의 재정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교회의 건물이나 교회 자체의 즐거움에 과도하게 재정을 소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투자된 교회 건물의 공간에 대한 효율적인 사용에 대한 명제는 교회 건축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교회의 성장과 쇠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쇠퇴를 살펴보면 사회적인 요인 같은 외적인 것보다 오히려 교회 그 자체의 효율성 상실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 교회의 쇠퇴의 원인으로 교회 성장이라는 꿈의 환상 속에 파묻혀서 시설 확충에만 열중하는 동안 신앙공동체 형성에는 속수무책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교회건축가인 이호진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공간 가용율은 30% 이하로 나타났다. 주일날을 포함하여 교회의 본당이 사용되는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많이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굳이 많은 비용을 들어야하는 것은 단순한 사용 미숙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자원의 낭비이다. 적은 비용으로 교회의 환경과 건물의 질을 올리는 방법은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다. 교회공간에서 대예배실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교회에서는 공간의 신비화를 극복하면 공간의 활용률을 높일 수 있다. 공간의 활용을 제한하는 가장 큰 요인은 경직성과 폐쇄성이다.
위계질서와 권위
한옥의 담장
볼 수 있으나 구별되고 가려진
이웃이 보아주는 담장
서로 바라보면 이야기하는 담장 바자울타리

 교회당 건물을 일종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있다. 교회당에 대한 이런 오해는 교회 건물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첫 번째 걸림돌이다. 교회를 성전으로 만들어서 그 결과 현대 기독교는 성도들에게 가장 비싸면서도 비능률적이고 저효율적인 종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그렇게 비싼 건물을 지어야하는 교회가 아니었다. 믿는 자들이 모이면 어디서나 세워질 수 있는 그런 교회였다. 교회당의 본당의 사용률이 낮아서, 교회의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된다면, 이것은 교회의 재정적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당의 활용을 높이기 위하여 장의자의 사용을 지양하고 강단의 높이를 낮추고 강단을 다용도화 할 수 있도록 개방화 한다면 훨씬 더 본당의 사용률을 높일 수 있다. 교회당을 성역화 하는 것은 바로 교회의 부담과 직결되는 것이다. 이 부담은 성도들의 몫이고 따라서 교회는 그만큼 교회의 힘을 건물에 뺏기게 된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교회의 건물이 화려하고 장엄해지면서 동시에 교회가 쇠퇴했던 한 이유가 된다. 또한 평일에 교회를 마을에 개방함으로 주차장과 공간의 활용을 높이고 상대적으로 주일에 집중되는 주차와 혼잡에 대한 여러 가지 마을사람들의 피해의식을 다소나마 감소시킬 수 있다.

3) 온돌의 영성--다목적 공간(multi - purpose space)의 효율적인 활용을 생각하자

 위치가 방의 명칭이다--안방 건너방 문간방 뒷간
용도는 언제든지 바뀌는 한옥
마당 비어있으나 모든 것을 수용하는 공간

다목적 홀의 활용부분에서 우리가 초대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중에 하나는, 공간의 활용도를 높여서 건축비용의 절감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교회는 기존의 시설과 얼마든지 기능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의 회당은 이념적으로는 그리스도교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공간의 활용 면에서는 서로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방에서라야 하고, 그러므로 그 방은 어떤 식으로든 거룩하게 따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교회가 어떤 방에 모일 때, 그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 앞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방 자체가 거룩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그 방에 회집할 때 그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적절한 행동과 그렇지 아니한 행위가 있다. 예배 장소로 선정된 방의 성격에 대하여 교회가 예배를 드릴 목적으로만 어떤 방을 건설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영성인가?

예배 전용 공간을 마련하는 데는 많은 대가가 따른다. 이것을 부담할 여유가 있는 교회도 있지만, 그 비용이 힘겨운 부담이 되는 경우도 많다. 만약, 우리가 다목적 공간을 예배에 활용하게 된다면, 초대교회에서나 영국의 미팅 하우스 (Meeting House)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며, 상대적으로 건축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배 장소가 좁은 경우는 예배당 확장 공사를 서두르기에 앞서서 예배를 2부, 3부로 늘리는 것도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또한, 모든 교인들이 동시에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새로운 교회 건물을 짓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대로 지내야 한다. 다지 주일 아침의 한 시간과 주일 저녁의 한 시간만을 위하여 비싼 대형 건물을 짓는 것은 청지기직을 형편없이 수행하는 것이요, 또 그것은 극히 소수의 교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이기도 하다. 교회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커 버리면 건물이 모든 교우들을 수용할 만큼 넓어도 모든 사람과 직접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멀쩡한 옛 건물을 허무는 것도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교회는 역사와 함께 존재해 왔다. 그 교회의 역사를 간직한 옛 건물에 대한 가치를 단순이 아파트를 헐고 다시 짓듯이 경제적인 잣대로만 계산하면 안 된다. 그리고 역사를 간직한 건물은 단순히 숭배하거나 성전화 하는 문제와는 다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현재를 살고 미래를 개척하는 교훈과 방향성을 지시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교역사와 교회역사를 간직한 옛 건물들에 대한 보존과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한 여러 가지 활용에 대한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우리나라에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갖는 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옛 건물을 보존하거나 기록하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은 안타까운 우리 교회역사의 자화상이다.

4) 한국 건축과 온돌의 의미를 생각하는 선교전략의 전환.
 교회건축은 집이다. 교회 건물을 지어 주는 선교전략을 바꾸어야 한다. 교회는 교인을 위해 짓는다는 생각에서 교회는 교인이 아닌 불신자를 위해 짓는다는 생각으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일은 선교사의 일이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고 그들이 함께 모여 신앙의 격려를 받도록 하는 일이지 결코 건물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교회를 세우면서 건물을 세워 준 일이 없다. 교회 건물을 지어주는 선교는 선교지의 성도들의 자립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해하며, 새로운 교회의 설립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건물을 지어 주는 것은 순수한 선교적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집안의 내력이 나타나는 집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선교도 하나님의 백성에 초점을 두어야지 보이는 성전을 세운다면 과거의 오류를 선교지에 다시 심어 주게 되는 것이다. 교회건물의 내부를 교인들의 사용용도에 맞추어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교회의 외관마저도 교인들의 생리에 맞춰 짓는 것은 선교 전략과는 상충되는 것이다. 신자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예배당의 모습이 불신자의 눈에는 감옥이나 부정적인 모습으로 보여 진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가 교회를 건축할 때 밖에서 바라보는 불신자가 호감을 갖고 들어오고 싶어지는 교회건물의 모습으로 계획되고 운영되어야 함을 첫째로 그 외관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

5) 온돌의 영성
 겸손과 배려
신을 벗음과 순종
침대와 배개
최근 ‘주님의 교회’나 ‘높은 뜻 숭의 교회’, 그리고 강남 YWCA회관을 사용했던 교회의 경우 학교나 공공기관의 강당공간을 사용하여 서로의 공간효율을 높이고 있는 것은 좋은 교회 건축의 본보기이다.
① 작은 집 한옥--적은 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개척하려고 할 때, 개척의 모델로 신약성경에 나타난 가정교회를 반드시 참조해야 할 영성이다. 이 성경적인 모델이 소홀히 여겨지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가정교회를 시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이다. 새로이 교회를 시작하는데 가장 큰 장애의 하나는 막대한 부동산 비용과 건축비용이다. 큰 도시 일수록 더 큰 문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부터 교회건물을 가지고 시작하려면 막대한 비용 때문에 개척 시작부터 교회에 본질적이지 못한 문제로 인하여 개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모델처럼,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 사람은 가정에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장소를 빌려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항상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 단지 임시적인 모임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정한 교회는 항구적인 자체 시설을 소유해야 한다는 암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에서 공유로 --사랑방문화로
 교회 개척의 측면에서 적은 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는 가정교회는 교회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교회 개척의 장애가 되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가정 교회는 집에서 모임을 가지므로 건축을 하거나 집세를 물거나, 집기류를 새로 구입해야 하거나, 냉난방에 따른 비용이나 유지 보수비용 등의 부담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에서 지원을 받거나 후원이 필요가 없다. 가정교회는 부동산 값이 비싼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② 온돌의 영성- 가족 공동체의 유지와 지도자 육성에 유리하다
  한옥은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교제를 확고히 할 수 있다.
아랫목공간에서 겨울나기--겨울잠을 자는 곰과 추은겨울 먹이를 찾아 헤매는 맹수들
 가정교회의 여러 장점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 생활의 질적 수준에 있다.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뿐만 아니라 형식적이지 않은 교제와 관계가 회중들 사이에 형성된다. 서로의 어려움과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격려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공동체 속에 매우 중요한 지체로서 인식되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가정교회의 수용성은 모임의 질적 수준과 관련된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높은 수준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6) 한옥은 작은집---큰 집--대교회주의 환상.
 한옥은 작다 그러나 마당은 넓다
한옥은 집의 형태는 다 비슷하지만 그 배치는 다 다르다. 지어진 장소에 따라 집은 비슷하지만 마당과 배치가 서로 다르다.
한국교회는 개교회 중심적인 교회성장 제일주의와 성전이나 중세기의 성당과 같은 대형 교회당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학을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해야 하는 목회자가 영혼 구원과 교회 성장에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다면 노력을 소모 할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다. 가시적인 교회 건축에 지나친 노력을 소모하는 것은 낭비이다. 끊임없이 교회당 건축으로 인하여 교회가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모든 교회의 힘을 소진하게 되는 것은 결코 신앙적 열심히 합리화 될 일이 아니다.
 교회가 입으로는 성육신의 수용성을 목회에 적용한다고 하면서, 실제 교회의 제도와 구조와 활동은 그렇지 않다. 복음 선포의 비언어적인 면은 교회의 구조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교회는 친근감이 있는 교제가 있어야 하는데 개인적이며 가까우며 서로 긴밀한 교제를 위해서는 작은 것이 유리하다.

 소규모의 교회를 주장하는 것은 자칫 교회의 성장을 포기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대교회주의를 향하여 한국교회가 노력한 것은 한국교회의 성장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현재의 성장의 둔화, 감소는 대교회주의를 포기해야 극복될 것이다. 교회의 생명력이 살아 있는 교회는 오히려 소규모 모임에서 더 활발하기 때문이다. 작은 교회를 많이 세우는 것이 실제로 교회가 성장하는 지름길이다. 대규모 교회를 지향하는 것은 겉으로는 성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쇠퇴하게 만드는 잘못된 것이다.
 대교회를 지향하여 교회가 선교와 교육에는 인색하면서 건물을 짓는 일에 많은 돈을 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한국교회는 구조적으로 이 모순을 부추기고 있으며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옥과 온돌의 영성은 작은집과 공유가 그 뿌리 이다

7) 한옥 검소함과 실용성의 아름다움
 한옥은 검소함과 실용성의 극치이다
떠있는 기초
휘어진 나무
쉼의 터전 사랑방문화
우리의 현실을 보면, 보다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수 십 년씩 저금을 하고 돈을 은행에 사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60년대와 70년대에 하던 그나마도 건전한 관행이다. 근래에 와서는 교회 건축을 위하여 은행돈을 빌리기를 예사로 한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기업 확장을 위하여 과잉 투자를 하는 바람에 IMF를 초래하게 되었다고도 하는데, 똑같은 방법으로 교회 경영을 해온 교회들이 IMF를 맞아 낭패를 당하고 있다. 교회도 금융 위기를 초래하는데 한 몫을 담당한 셈이다. 온 국민이 어려움을 당하므로 교회도 역시 재정적인 어려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업처럼 운영하다 기업이 겪는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회가 한 둘이 아님은 유감이다.

 교회가 많은 빚을 져서 선한 사업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헌금의 대부분을 은행 이자로 지출한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허무한 일이다. 헌금 전액을 차압당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기업 경영과 목회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아니 교회당을 분수에 넘치게 더 크게 지어 대교회로 맘모스 교회로 만들어 보려는 허욕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교회가 예배당을 크게 짓기 위하여 많은 돈을 융자받고 하다보면 맘몬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교회가 부자연스럽게 교회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또한 그러기 위하여 큰 예배당을 짓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운동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바벨탑을 쌓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노엽게 여기시고 흩으신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여러 면에서 중세 교회를 닮아버렸다. 교회 건축을 위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부역하게 하고 교회를 파산지경으로 이끄는 그런 교회 운영은 들을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장이신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목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한옥의 영성--자연에 있는 나무와 흙과 돌을 사용하여 집을 짓고 허물어지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집 한옥 --- 한사람의 생명정도의 기간으로 존속하지만 무한히 재생산되고 변화하며 1000년을 가는 지속가능함을 추구하는 한옥

8) 한옥과 온돌은 영성의 새로운 패러다임.
 한옥은 편리한 집 능률적인 집이 아니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집이다
초대 교회의 교회의 인상은 주택이었다. 만약 초대교회 시대에 어떤 사람이 낮선 동네에 들어가서 교회를 찾는다면, 그는 어떤 사람의 집으로 안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오랜 세월을 거친 지금은 뾰족탑으로 바뀌었다.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 뾰족탑으로 상징되는 고딕양식은 교회가 무능, 무지, 타락, 세속화 되었던 시대의 상징이다. 어느 것이 더 교회에 적합한 이미지 인가?
뾰족탑이 교회를 상징한다는 그 의식도 개혁해야할 부분이다. 초대교회는 외부에서는 주택인지 교회인지 인식도 되지 않는 그런 형태를 가지고도 세계를 정복했다. 그런데 우리는 곳곳에 뾰족탑과 십자가를 걸어 놓고도 고전하고 있다. 교회의 힘이 보이는 상징이나 장엄함에 있지 않다는 하나님의 진리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 있다. 교회가 고딕에 대한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그 시대의 가치관을 일부 동경한다는 의미가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우리는 교회에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다. 한국건축과 온돌의 영성을 통한 미래 지향적인 교회 건축 방향의 제안
기존 교회건축의 현안
1)기존 교회당 건축의 장점
- 오랜 전통을 무조건 무시하는 것은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다.
- 교회 내외에 공동체의식을 고취(sense of identity)할 수 있는 공간 확보가 관건이다.
- 교회당 공간의 존재는 지역사회와 빈민지역에서의 이웃 주민을 위한 공동 활동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다.
- 공동예배, 상담, 다양한 대소 모임 등 창의적인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며 도심 속에서의 영적 Oasis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ex: 스리랑카 콜롬보의 24시간 개방교회- 예배, 상담, 영적 묵상  )
2) 상징과 메시지
- 교회건물은 이웃에게 참여와 헌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 유동적인 도시상황, 빈민가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착한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회중의 헌신은 교회와 그 사역에 대한 충성과 열정을 반영하며 공동체로서의 유대를 강화하며 공동의 사업의 기회를 제공한다.
- 목회자의 교회당에 대한 감정, 정서적 애착은 개인적인 것으로 자기정체성과 관련되는 사항으로 일반 신도에게 강요하거나 주입해서는 안 된다.
3) 건물로서의 교회건축의 중요성
- 쿠바, 중국 등 제한지역의 교회건물은 활용이 문제될 수 있고 감시와 통제가 주된 관심사가 된다.
- 멕시코의 경우는 모든 교회건물이나 자산을 국가의 소유로 등록되어야 한다.
- 모슬렘 국가에서의 교회당은 그 정체성을 보전하지 못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국제교회 파괴되었고 참혹한 내전의 상징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 문화혁명 후 중국 내 교회당 건물의 회복되고 있으며 교회당의 원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여러 가지 다른 용도-전시장, 집회장-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4) 부정적인 요소로서의 교회건물
- 구입, 건축, 유지관리를 위한 막대한 비용지출의 문제를 안고 있다
- 서구의 몰락한 교회당에서 건물 후속용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 누구를 위한 건축인가? 비신자? 혹은 기존 신자?
- 문턱이 높아진 교회의 모습-비신자와 소외된 자를 위한 건축이 필요하다
- 감옥 같은 이미지의 교회 모습-신자들은 엄숙하다고 느끼는 교회가 대부분의 불신자들에게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다가간다.
- 가난한 자들, 과부 , 고아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교회-부유층과 특권층을 위한 형태의 교회를 양산하고 있다

라. 나가는 말

우리는 한국 건축과 온돌의 영성을 통하여 이시대의 영성의 의미를 되찾아야한다.
한옥과 온돌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과는 식탁을 같이하신 반면에, 부자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도전하셨다. 또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그와 같은 아이들의 것”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환영하셨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과도한 예배단 건축게 집중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회 계층에 속했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최소한의 삶이나마 살 수 있도록 사회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검소한 삶을 살도록 외쳐야 한다.

집은 그 사람의 거울이다. 사람이 건물을 짓지만 결국 집이 사람을 짓는다.
우리는 올바른 재정의 사용과 교회 건축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는 포기의 삶을 본받으라고 외쳐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또한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과 하나가 되는 사도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그 이상의 요구에 대해서도 알려야 한다.
대부분의 시골 목회자들이 건축법이나 소방법과 각종 토지 관련법 등을 위반한 범법자(전과자)가 아주 많은 현실을 두고 우리는 다시 한 번 교회건축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인식해야만 한다, 예배드리는 자들 가운데 생기는 일로 예배를 평가하는 것은 예배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두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교회 건축과 관련하여 우리가 교리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면 먼저 교회당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루터의 글을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그 거처를 건축하고 장식하며 완성하는데 필요하게 될 모든 종류의 신성한 재료를 몸에 지니고 오십니다. 말씀과 성령의 은사들이 그가 건축하는데 사용하는 재료들입니다. 비록 그 거처가 다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인은 하나님의 집이 되며,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지식과 지혜와 신앙과 은사들과 미덕들이 점점 강하게 자라남으로 해서, 그는 끊임없이 준비되고 향상 됩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성도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교회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려는 노력만이 교리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변화된 성도들 자신이 하나남의 집이다. 보이는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 아니다. 교회 건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모이는 장소로서 분명히 세상건물과 구별되지만 역시 사람들이 거처로서 사용하는 종교건물의 일종으로 세상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지켜야하는 당위성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부패한 카톨릭 교회, 즉 기구로서의 교회를 염두에 두고 교회의 쇄신을 주창하면서 교회의 개념을 이분화 하였다.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의 성장과 동일시함으로써 보이는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라는 로마 카돌릭의 교회관에 반하여, 루터는 ‘내적인 교회’와 ‘외적인 교회’로 나누어 말하고, 칼빈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여 말하였다. 완전한 구원으로 택함을 받은 성도의 모임을 ‘내적인 교회’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하고, 최종적인 구원은 받지 못했으나 교회에 적을 두거나 출석하는 교인들을 다 포옹하는 현실의 교회를 ‘외적인 교회’ 또는 ‘보이는 교회’라고 하였다. 그런데 ‘보이는 교회’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교권주의 교회가 되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추구하면 분리주의 교회가 된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교회 개념을 이분화하면서도 실제 우리가 관여해야 할 교회는 보이는 교회라고 말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교회’, 즉 ‘참 신자들만의 교회’를 추구하는 재세례파의 교회관을 반대하고 칼빈 자신은 제네바의 시 교회를 목회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칼빈의 교회관은 곧 바울의 교회관과 상통한다.

바울은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한편, 홈이 많고 불완전한 현실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교회상을 가르친다. 현실의 교회는 성화의 과정에 있는 교회, 즉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불완전한 교회이므로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과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는 현실의 불완전한 교회에 충실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함께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칼빈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전제하면서도 ‘보이는 교회’에 충실하고 또한 ‘보이는 교회’에 충실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교회’를 지향해야 함을 말하였다.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주거문화가 이어져 왔듯이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교회 건물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구약시대 성막과 성전건축이 당시에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것처럼 신약시대에도 교회 건물의 변화가 구교와 신교의 분리와 발전과 변화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구교의 요란한 성전을 짓기 위한 자금모금으로 했던 면죄부의 판매와 건축 비리 등을 항거하기위해 종교개혁을 했던 신교가 당시 구교의 형태와 비슷한 형태로 닮아가고 있는 요즘의 현실은 보면 마틴 루터나 칼빈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한국건축에서 추구하는 자연친화와 지속가능건축에서 그리고 온돌을 통하여 배려와 상생을 추구했던 한국의 주거문화를 통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영성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김준봉(kimjuneb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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