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봉교수 추천 저서 ==
흙과 불의 과학적 만남
   흙과 불이 어떻게 과학적으로 만났나? 무슨역할을 하나? 제목으로부터 작은 질문을 유발시켜 점점 흥미를 유발시키는 온돌...
북경공업대학교 김준봉 교수의 세 번째 이야기 - 뜨근뜨근 온돌
   북경공업대학교 김준봉 교수의 세 번째 이야기 - 뜨근뜨근 온돌 세 번째 이야기 - 뜨근뜨근 온돌 인물들의 표정만 봐도 ...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온돌 그 찬란한구들 문화'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 ‘온돌(Ondol) 그 찬란한 구들문화’ 개정증보판 김준봉․리신호․오홍식 지음 국...
중국 생활 10년 체험담을
   약간 엄한 교수님 같은 인상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면서 금세 연극배우 같은 표정으로 바뀐다. 김준봉(48) 교수에게는 표정만큼 ...
중국유학, 그 모든 것을 알려주마!
   중국유학, 그 모든 것을 알려주마! [서평] “중국유학, 성공을 위한 13가지 열쇠”, 김준봉,어문학사 김영조(sol119) ...
49
478
757
815,133
  현재접속자 : 19 (회원 0)

  교수소개 논문집
   
  [Housing-민가관련] 혁철족(赫哲族 ,허저족)민족 거주문화
  글쓴이 : 북경운아     날짜 : 08-03-10 19:56     조회 : 12693    
  트랙백 주소 : http://www.kjbchina.com/bbs/tb.php/papers/16

 혁철족(赫哲族 ,허저족)민족 거주문화

1. 개 요

허저족[赫哲族, 혁철족]은 쑹화강[松花江, 송화강], 헤이룽강[黑龍江, 흑룡강], 우쑤리강[烏蘇里江, 오수리강] 연안에 거주하는 민족으로서, 중국 북방에서 유일하게 어렵으로 생활하고 개를 사용하여 눈썰매를 끄는 민족이다. 그리하여 “어피부(魚皮部)”나 “사견부(使犬部)” 등으로 불리었다.

허저족의 언어는 알타이어계 퉁구스 어족 만주어 갈래에 속한다. 허저족의 언어는 고대 여진어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주로 치넌어[奇嫩語, 기눈어]와 허전어[赫眞語, 혁진어]의 두 계통이 있다. 중국 경내에 거주하는 허저족은 치넌어를 사용하고, 러시아 경내에 거주하는 허저족은 주로 허전어를 사용한다. 허저족은 인구가 적고 거주지가 분산되어 있으며, 또 일찌기 한족과 잡거하여왔기 때문에 한어[漢語, 한어]와 한자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현재 자민족 언어로 말할 수 있는 허저족은 극히 적은 실정이다.

허저족의 생업은 어업 위주로 농업과 양식업을 겸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봉타포자표요어, 야계비도반과리(棒打子瓢, 野鷄飛到飯鍋里, 즉 몽둥이로 노루잡고 바가지로 물고기 뜨고, 꿩이 날아 솥에 들어간다.)”는 바로 허저족의 어렵생활을 잘 묘사하고 있다. 허저족이 생활하는 지역은 하천이 많아 일년 사계절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어렵경제에 편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어렵생활로 허저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고기잡이에 능하다. 그들은 물고기의 습성을 아주 잘알아, 물고기가 물에서 움직일 때 일렁이는 물결만 봐도 어떤 물고기인지 감별해낼 수 있다. 그리고 물고기를 작살로 잡는 기술은 놀랄만큼 숙련되었다.

수렵은 허저족의 또다른 생업방식으로서 푸진현[富錦縣, 부금현] 따툰[大屯, 대돈] 이상의 쑹화강 일대에 거주하는 허저족은 수렵을 위주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어렵도 겸하고 있고 단순히 수렵만으로 생업을 삼지는 않는다. 허저족은 스키를 타고 얼음이나 눈 위에서 야수를 쫓는데 능하다. 속담에 “목마를 타고 산과 물을 건너고, 화혜를 신고 강을 건넌다.(騎木馬竄山跳澗, 穿花鞋江過河)”는 말은 허저족 수렵민의 민첩함을 설명해준다. 초기의 수렵도구는 주로 활과 화살, 그리고 “격달창(激達槍)”이고, 주로 담비를 잡았다. 청 말기에 총포가 들어온 이후에는 주로 사슴을 잡았다. 수렵은 집단으로 행하였고, 대여섯명이나 십여명이 자원해서 결합하여 한 조를 이룬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하고 경험이 풍부하며 지리에도 밝은 사람을 뽑아 지휘를 맡긴다.

청대 말기 이후 한족의 이주가 많아지면서 일부 허저족은 농경을 배워서 어렵 후에 적은 양의 토지를 경작하기도 하였다. 농기구는 주로 한족지역에서 들여왔고, 농작물은 주로 옥수수와 수수, , 감자 등을 재배하였다.

허저족의 전통 복식은 어렵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로 물고기, 노루, 사슴의 가죽을 이용하여 옷을 만들어 입는다. 이중에서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어피복식(魚皮服飾)이다. 제작 방식은 연어나 잉어 등의 가죽을 벗겨서 그늘에 말린 다음 비늘을 제거한다. 연후에 방망이로 두드려서 면포같이 부드럽게 만들어 연어가죽으로 만든 실로 바느질을 하여 완성한다. 어피의(魚皮衣)는 주로 긴 옷이며 여성이 입고, 양식은 만주족이 즐겨입는 “치포우[旗袍, 기포]”와 같다. 어피바지(魚皮)는 남녀 두 가지가 있다. 남자식은 어렵에 편리하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겨울에는 수렵시에 추위를 막고 질기며, 봄가을에 물고기를 잡을 때에는 방수와 무릎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 20세기 초기에 포목()이 전래된 이후, 천이 어피나 수피(獸皮)를 점차 대신하게 되었고, 일반적으로 외투는 가죽으로 만들고, 속옷은 천으로 만들게 되었다. 현재 허저족의 어피의는 주로 민간공예품으로 박물관이나 연구자 및 여행자들에게 수집되고 있다.

허저족은 물고기를 익히지 않고 날것으로 먹는 습관이 있다. 어피에서 물고기 알과 고기 및 뼈까지 날것으로 먹는다. 가장 흔한 요리는 “반채생어(拌菜生魚, 채소로 무친 날고기)”가 있고, 이외에도 동어편(凍魚片), 생어자장(生魚), 어조(魚條), 말린 고기(魚乾), 어송(魚松) 등의 요리법이 있다.

2. 역사적 배경

기원과 관련하여 허저족 사회에서는 “남천(南遷)”의 전설이 보편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설의 내용은 허저족이 고대에는 베이하이[北海, 북해] 변에 거주하면서 어렵과 수렵으로 생활을 하다, 어장을 둘러싼 전쟁에서 패하고 삼강(三江, 즉 헤이룽강, 쑹화강, 우쑤리강을 말함)유역으로 남하하였다는 것이다.

허저족과 중국 동북지역의 고대민족인 “숙신(肅愼), “읍루(), “물길(勿吉), “흑수말갈(黑水靺鞨), “야인여진(野人女眞)” 등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해경(山海經),『대대례기(大戴禮記),『후한서(後漢書)』등의 문헌을 보면 상주(夏商周)를 거쳐 진한(秦漢)에 이르기까지 숙신(혹은 稷愼)이 등장한다. 한대(漢代)에서 위진(魏晋)시기에는 읍루가,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이, 수당시대에는 말갈이 등장한다.

요대(遼代)에 허저족의 조상은 생여진(生女眞)의 일부였다. 그리고 금대(金代)에는 “올적개제야인(兀的改諸野人)”으로 불렸고, 원대(元代) 초기에는 “올적가(兀的哥)”라 불리웠다. 원대 후기에는 이들과 삼강유역에서 어렵에 종사하는 민족을 통합해서 “,수달달(水達達)” 혹은 “석달륵달(碩達勒達)”이라 불렀다. 명대(明代)에 허저족은 여진의 한 갈래였다. 명대의 여진인은 해서여진(海西女眞), 건주여진(建州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의 세 계통으로 나뉜다. 이중에서 허저족의 선민으로 여겨지는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은 당시 어렵경제를 위주로 했다. 청나라 초기의 문헌에는 “헤이찐[黑斤, 흑근], “헤이치[黑其, 흑기], “허쩐[赫眞, 흑진], “치렁[奇楞, 기릉], “헤이저[黑哲, 흑철], “허찐[赫斤, 혁진], “허찐[赫金, 혁금], “허저[赫哲, 혁철] , 등의 명칭이 보인다. 중공이 성립된 후에 민족의 통합 명칭으로서 허저[赫哲, 혁철]을 사용하였고, 이는 “동방 혹은 강의 하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허저족의 인구는 비교적 적어 현재 약 4000여명이 있고, 주로 헤이룽쨩성의 통쨩시[同江市, 동강시], 료우허현[饒河縣, 료하현], 푸위엔현[撫遠縣, 무원현]에 분포하고, 쩨진커우[街津口, 가진구], 쓰파이[四排, 사패], 빠차[, 팔차]의 세 개 민족향이 있다.

3. 건 축

허저족은 원시적인 주거에서 현재의 주거를 사용하기까지 많은 변화를 거쳤다. 여기서는 이런 허저족의 계보를 확인하려고 한다. 사서 『진서(晋書)』에 의하면 “夏則巢居、冬則穴居-여름철에는 초우[, ]에 거주하고 겨울철에는 혈()에 거주한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허저족 조상들의 거주습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거주형식에는 주로 어렵(漁獵)를 하거나 수렵(狩獵)을 할 때 주로 많이 사용하는 춰뤄안커우[撮羅安口, 촬라안구]와 쿼언뿌루안커우[闊恩不如安口, 활은부여안구], 띠인즈[, 지음자]가 있고 그와 다른 형식의 마쨔즈[馬架子, 마가자]와 정방[正房, 정방] 그리고 부속 창고건축물인 타커투[塔克吐, 탑극토]가 있다.

3.1. 춰뤄안커우[撮羅安口, 촬라안구]

 춰뤄안커우[撮羅安口, 촬라안구]는 허저족 주거를 대표하는 유형으로서 지상에 지어지는 임시주거이다. “춰뤄[撮羅, 촬라]”는 허저족 언어로 뾰족하다는 뜻이며 “안커우[安口, 안구]”는 천막 또는 텐트[棚子, 붕자]를 뜻하는 것이다. 춰뤄안커우는 허저족 말이어서 중국어로 기록될 때 여러 가지로 불린다. 춰뤄즈[撮羅子, 촬라자], 춰뤄앙쿠[撮羅昻庫, 촬라앙고]는 다 춰뤄안커우[撮羅安口, 촬라안구]와 같은 뜻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춰뤄안커우[撮羅安口, 촬라안구]는 한마디로 말해서 원추형 텐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원추형 주거는 허저족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룬춘족[鄂倫春, 악륜춘]과 같은 민족도 사용하고 있는데 시에런쭈[斜人柱, 사인주]라고 부른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어룬춘족의 시에런쭈에는 중간에 기둥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명칭

덮는 재료

사용계절

총칭

세부명칭

춰뤄 안커우

(撮羅安口, 촬라안구)

혹은

(撮羅昻庫, 촬라앙고)

오루거터 안커우

(敖如格特安口, 오여격특안구)

마른 풀

(茅草, 모초)

여름

타라 안커우

(塔拉安口, 탑납안구)

화수피*

(樺樹皮, 화수피)

여름

원터허 안커우

(溫特和安口, 온특화안구)

나무 판

(木板, 목판)

겨울

안타 안커우

(按塔安口, 안탑안구)

짐승가죽

(獸皮, 수피)

겨울

보우스 안커우

(保斯安口, 보사안구)

천막

(, )

겨울

 이를 만드는 방법을 보면 규모가 작은 경우는 길이가 약 3m, 규모가 큰 경우는 길이가 6m되고 굵기가 6~9cm의 나뭇가지가 원추형 골조를 이루는데 나뭇가지 사이의 간격은 25~30cm가 되며 골조의 수는 보통 10~20개인데 이 수는 거주할 사람의 수에 맞게 규모가 정해진다. 허저족 사람들이 가족과 같이 거주할 때가 아니고 남자들이 사냥을 나가서 산속에서 몇일 씩 묵게 될 때 지어져 사용되는 춰뤄즈의 경의 이는 규모가 비교적 작다. 또한 겨울에 강에서 얼음을 깨고 고기를 낚을 때도 춰뤄즈를 만는데 이는 거기서 거주하기보다는 얼음구멍위를 덮어 해빛을 가려서 고기들이 모일 수 있게 하는데 원인이 있다. 몇 개의 나뭇가지를 횡으로 둘러서 골조를 고정시키고 남쪽에 입구를 만든다. 골조를 고정시킬 때는 끈 혹은 들의 풀을 꺾어 풀로 고정을 시킨다. 입구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마른풀을 엮어서 골조의 밑부분부터 위쪽으로 한바퀴씩 둘러싼다. 가죽 끈으로 풀을 골조에 고정시키고 가장 하단에 덮는 풀은 뿌리 부분이 밑으로 가게 하고 그 위의 상단부분은 뿌리부분이 위로가게 한다. 이는 비가 올 때 비가 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골조위에 덮는 재료는 마른 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 이는 사용계절에 따라 덮는 재료가 달라지며 부르는 명칭도 달라지는데 표3과 같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원추형 주거는 골조를 만드는 재료와 방법은 사용계절에 따라 상관이 없이 같으나 위에 덮는 재료들은 사용계절에 따라 다르고 부르는 명칭도 다르다. 마른 풀과 화수피는 여름에 사용되고 보온을 할 수 있는 재료인 나무판과 가죽, 천은 겨울철에 사용된다. 이런 주거건축형식은 현재 사용하지 않아서 사라졌으며 자료나 박물관에서만 볼 수가 있다. 아래 그림3는 현지조사 시 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던 춰루안커우이였는데 이는 규모가 비교적 작았다. 그림에서 보이진 않지만 안에 짐승 한마리를 매단 것으로 보아 이는 수렵 시 산에다 임시로 지은 것임을 알수가 있다. 수렵 시 짓는 춰뤄안커우는 가족들이 다 같이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 사용하는 것보다 작다. 그림4은 강을 따라 강변에 만들어진 원터허안커우인데 윗부분에 덮개로 덮지 않고 골조만으로 내놓은 부분은 내부 취사난방할 때 필요한 2척 폭의 배연구인데 다른 것도 차이를 보인다.

춰뤄안커우의 내부공간사용을 보면 북쪽(출입구에서 안쪽을 바라볼 때 맞은 켠)은 상석인데 연세가 드신 분들의 자리이고 동서 양쪽은 청장년들의 자리이다. 여름에는 밖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밥을 짓지만 가을에 바람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안에서 쪼우꿔[弔鍋,조과]를 걸고 불을 지펴서 밥을 짓는다.

겨울에 사용하는 허저족의 원추형 주거건축은 북방에서 많이 쓰이는 실내에 난방을 취하는 방식인 캉[, -구들]이 없고 모닥불 같은 것을 지펴서 밥도 짓고 난방도 취한다.

3.2. 쿼언뿌루안커우 [闊恩不如安口, 활은포여안구]

쿼언뿌루안커우에서 “쿼언뿌루[闊恩不如, 활은포여]”는 허저어로 “웬딩[圓頂,원정], 즉 “둥근 지붕”이라는 뜻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지붕이 둥근 집이라는 뜻이다. 이런 주거건축을 퀀언뿌루안커우[闊恩不如安口, 활은포여안구] 혹은 쿤뿌루안커우[昆布如安口, 활은포여안구]로 또는 안커우[安口, 안구]를 앙쿠[昻庫, 앙고]로 불러 쿼언뿌루앙쿠[闊恩不如昻庫, 활은포여앙고] 혹은 쿤뿌루앙쿠[昆布如昻庫, 곤포여앙고]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이들은 다 같은 종류의 건축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이것도 역시 허저족 언어를 중국어로 옮겨 기록하는데서 생기는 차이 때문이다.

만드는 방법은 직경이 3cm인 버드나무 가지를 불로 달궈서 구부러진 형태를 만든 뒤, 일정한 간격(보통 50cm)으로 하나씩 땅에 묻어 세우고 하나로 연결하여 터널형태()로 만든다. 가지가 짧으면 두개를 이어 만들 수 있다. 전후 양 끝에는 십자형 문설주를 묶어 고정시켜 움직이지 않게 하며 뼈대 주위는 밑에서부터 위로 층층히 마른 풀을 덮는다. 문이 낸 쪽이 서쪽이 되며 그 반대편과 양쪽에는 다 창문을 낼 수 있다. 이러한 집의 크기는 큰 것이 길이가 5m, 폭이 3m, 높이가 2m정도가 되며 작은 것은 길이가 2m, 폭이 1m, 높이가 1m정도가 된다. 작은 것은 높이가 낮아 실내에서 바로 설수가 없으며 들어갈 때도 허리를 굽혀서 들어가야 한다. 허저족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기잡이할 때 많이 사용하는데 실내의 바닥에 마른풀을 깔고 그 위에서 거주한다. 때문에 안에서 불을 지필수가 없다. 이를 만드는데 춰뤄안커우보다 품이 더들어 대부분 춰뤄안커우(撮羅安口, 촬라안구)사용하였다고 한다. 쿼언뿌루안커우에 사는 사람들은 비교적 부유하거나 따지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런 건축형식은 문헌에 기록으로만 남아있고 도면으로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2003 7월의 현지조사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른 건축형식보다는 많이 상용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3.3. 띠인즈[, 지인자]

띠인즈[, 지인자]는 또한 허저족 말로 후루뿌[胡如布, 호여포] 혹은 시르미엔커[希日免克, 희일면극]라고 부른는데 비교적 원시적이고 간단하게 만든 한랭한 지역의 반지혈식 거처이다. 이는 비록 고정된 주거이지만 허저족 사람들은 1~2년밖에 사용하지 않고 다시 짓기 때문에 이는 임시주거라고 말할 수 있다.

띠인즈를 만드는 방법을 보면 땅 밑으로 70~80cm 깊이로 방형의 구덩이를 파는데 이의 크기는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에 따라 정해진다. 구덩이의 지붕 위에는 1~2개의 굵고 장대한 나무를 이용하여 보를 만들고 도리와 서까래를 올려 쐐기 형태의 뼈대를 지지한다. 위에는 갈대 또는 수수로 만든 발을 깔거나 나뭇가지를 덮고 15~20cm의 흙만 덮고 풀을 깔지 않는데 추위를 피할 수 있다. 태양을 향한 남쪽 면에는 문을 내고 그 옆에는 작은 창이 각각 한개 나있고 햇빛이 투과되도록 한다. 초기에는 물고기의 일종인 비늘을 벗긴 삶지 않은 랜위[, 련어]껍질을 이용하여 문과 창을 발랐는데 후에야 종이로 바르고 그위에 생선기름을 발랐다고 한다.

2003 7월의 현지조사에서 조사했던 띠인즈는 2개가 있었는데 그림 5는 퉁쨩시 쩨진커우 허저족 문화촌[同江市 街津口 赫哲族 文化村, 동강시 가진구 혁철족 문화촌]에 있었던 띠인즈인데 반지혈식이라 지붕아래선까지 땅에 묻혀있는 경우이고 同江市 街津口 赫哲族鄕에서 조사했던 쑹화강변의 언덕에 지어진 여우춘썽[尤春生, 우춘생] 민가(그림6, 8)의 경우는 언덕을 파서 그 속에 띠인즈를 세운경우이다. 이 집의 경우 입면을 볼 때 거의 마쨔즈9馬架子, 마가자0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실내가 땅을 파고 들어간 반지혈식인데서 차이가 보이고 있다. 마쨔즈[架子, 마가자]는 지상에 지어지는 지상건축이기 때문이다.


띠인즈 내부는 보통 벽이 없이 한 칸으로 되고 캉[, -구들]이 놓여 있고 한쪽으로 캉[, ]과 연결된 부뚜막이 한쪽에 놓이며 굴뚝이 지붕 위로 설치된다. 아이들이 있는 경우 부뚜막의 솥에 빠지지 않게 부뚜막과 캉사이에는 높이가 높지 않은 칸막이벽이 있다고 한다. 그림3의 경우 북쪽에 캉이 놓이고 부뚜막이 남아있지 않고 단지 아궁이만 왼쪽에 남아있는 경우이다. 남향의 문 옆 동쪽에 창고인 타커투[塔克吐, 탑극토]가 지어져 있으며 그 앞으로 옥외의 취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림 9의 경우에서는 캉의 크기가 그림 8의 여우춘썽 민가의 경우보다 좀 큰 것을 볼 수 있고 옆의 단면도에서는 지붕이 아래선의 높이가 지면의 높이와 일치한 것을 볼 수 있다.

띠인즈는 비록 간단한 구조로 된 반지혈의 원시 주거형태를 갖고 있지만 흑으로 덮었기 때문에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띠인즈[, 지인자]보다 좀더 큰 규모로 된 것을 시르미엔커[希日免克, 희일면극]라고 한다. 겨울철에 고기잡이할 때, 어렵생산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지어서 사용하는 주거이며 보통 길어야 2년정도 사용한다.


3.4. 마쨔즈[馬架子, 마가자]


마쨔즈는 또한 쭤[, ]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고정형 지상주거이다. 평지의 지상에 흙벽돌로 짓고 집을 짓는 방법은 일반 주택과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다른 일반주택들과 다르다면 양쪽 측벽이 남북 향을 하고 있고 출입구가 남쪽 측벽에 나 있는 것이다. 문의 양측에 각각 창문이 나있고 실내의 북쪽 측벽에 동서로 캉을 놓고 부뚜막은 캉의 남쪽에 있으며 식장은 부뚜막 부근에 있다. 실내 바닥의 중앙에 화로를 놓는다고 기록에 나와 있는데 이는 이 지역이 고한지대이므로 추울 때 보조 난방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 11 1984년에 출판 된 책에 있는 사진인데 여기서 마쨔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003 7월 현지조사를 진행할 때는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현존하는 마쨔즈를 보지 못했고 다만 문화촌의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마쨔즈(그림 10)를 볼 수가 있었다. 전시된 마쨔즈는 동쪽 벽에 따라 좁은 캉이 놓여 있는데 기록과는 다소 다르다. 이는 전시된 것이라 얼마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현지조사 중 면담에서 이런 마쨔즈는 벽을 나무판으로 세로로 세워 만들었다고 한다.

3.5. 정방(正房, 정방)

정방은 2~3칸으로 된 흙집 혹은 벽돌집을 가르켜 하는 말이다. 허저족의 정착식 주거인 정방의 역사는 200~300년 정도 된다. 이는 허저족이 청나라의 통치를 300년 동안 받으면서 생활 관습은 만주족[滿族, 만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최근 40여년 동안 한족[漢族, 한족]의 영향도 컸으므로 생활습관은 이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때문이 이 정방은 허저족의 고유의 주거문화이기보다는 이들이 정착하면서 다른 민족으로부터 배워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도 정착과정에서 간단한 흙집부터 시작하여 재료가 벽돌로 바뀌기도 한다.

배치형식은 남향이며 터커투[塔克吐, 탑극토]가 마당의 동남 모퉁이나 서남 모퉁이에 짓는다. 변소는 집의 동측 집 뒤에 있으며 서쪽에 놓이는 것을 금지하는데 이는 허저족은 서쪽을 귀하게 여기는 방향이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부공간구성을 놓고 보면 2~3칸이 대부분이고 옛날 부자집에서는 5칸집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림14 2칸형 평면인데 동쪽이 부엌이고 서쪽이 침실이다. 그림12 3칸형인데 이 경우 중간이 부엌이고 양쪽이 침실이다. 부엌을 와이우[外屋, 외옥]라고 부르고 동쪽방을 뚱우[東屋, 동옥], 서쪽방을 시우[西屋, 서옥]이라고 부른다. 침실을 보면 남북면에 각각 캉[, ]이 있고 두 캉을 연결하는 좁은 캉이 서쪽측벽을 따라 놓이게 된다. 이렇게 3면으로 놓인 ㄷ자캉을 “완쯔캉[卍字, 만자항 또는 万字, 만자항]”이라고 한다. 집집마다 다 이런 완쯔캉이 놓이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러했으나 필요에 따라 시캉[西, 서항]을 없애거나 난, 베이캉[,, ,북항] 중의 하나를 없애기도 한다. 그림15의 경우가 베이캉[, 북항]과 시캉[西, 서항]이 없어지고 뚱캉[, 동항]이 넓어진 경우이다. 방의 사용에 있어서는 서쪽이 귀한 방향이므로 3칸집에서는 서옥에서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거주하고 조상 및 여러 신상들을 다 서옥에 봉하고 있으며 만약 2칸일 경우 난베이캉[南北, 남북항] 일 때에는 노인들은 습관상 난캉[, 남항]에서 거주하고 만약 난베이캉이 아니고 캉이 하나 밖에 없는 경우는 노인들이 제일 따뜻한 부뚜막과 가까운 곳에 주무시고 다음은 결혼하지 않은 작은 아들, 딸이고 큰 아들과 며느리는 윗목에서 잔다고 한다.

그림13에서 정방의 동쪽에 나와 있는 건물은 부속건축물인 창고-타커투[塔克吐, 탑극토]인데 이를 타커투[塔克吐, 탑극토] 또는 위러우즈[魚樓子, 어루자]라고도 하며 이런 건축과 비슷한 건축을 주거건축으로 쓰고 있는 어원커[鄂溫克, 악온극]족은 이를 무컬렁[木克楞, 목극릉]이라고도 한다. 창고건축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정방에서 사는 허저족들은 여름철 더울 때는 때로는 타커투[塔克吐, 탑극토]에서 자기도 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틀집과 짓는 방법이 같다고 보면 된다.

1.1.4. 주생활

허저족의 주거는 헤이룽강, 쑹화강, 우쑤리강의 삼강(三江)유역을 중심으로 강을 따라 강안에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그들의 주생산방식인 어렵(漁獵) 생산에 편리하도록 생산 장소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지어진 것이다.

주거의 종류는 옮겨 짓는 것과 고정된 것, 즉 이동성에 따라 임시주거와 고정주거로 나눌 수 있다. 임시주거는 거주보다는 생산을 위해 사용되는 주거로서 춰뤄앙쿠[撮羅昻庫, 촬라앙고], 원터허[溫特合, 온특합], 쿼언뿌루앙쿠[闊恩布如昻庫, 활은포여앙고], 보수앙쿠[博蘇昻庫, 박소앙고] 등이 있으며, 어로(漁撈)와 수렵(狩獵) 생산의 이동활동에 근거하여 수시로 옮겨짓는 임시 거처이다. 고정주거는 임시주거보다 거주성이 높은 주거형태로서 강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지대가 높은 곳에 짓는다. 고정주거에는 후루뿌[胡如布, 호여포], 시르미엔커[希日免克, 희일면극], [, ]가 있다.

허저족의 전통적인 주생활은 그들의 주요 경제 활동이었던 어렵과 수렵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그들의 생산방식이 낳은 주거 형태에 따른 주생활은 다음과 같다.

1.1.4.1. 춰뤄앙쿠[撮羅昻庫]

허저족은 어렵 생산을 주업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 계절에는 남자들은 집밖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여자들은 대부분 따라 가서 밥을 짓거나 어장에서 어류를 가공하는 작업을 한다.(그림 16) 또한 여름철 고기잡이로 가족이 마을에서 떨어진 먼 곳으로 떠나 야외에서 숙박을 하게 되고 집 안의 노인들은 남아 집을 지킨다. 이 때 생산 장소에 머무를 때마다 임시거처용으로 짓게 되는 것이 춰뤄앙쿠[撮羅昻庫, 촬라앙고]이다. 춰뤄앙쿠[撮羅昻庫, 촬라앙고]는 원추형의 임시주거를 뜻하는 일종의 통칭이며, 계절에 따른 재료의 종류에 따라 그밖에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워진다. 춰뤄앙쿠는 굳이 구분하자면 여름용 주거를 뜻한다.

촬라앙커의 구조는 가운데 기둥과 기둥을 중심으로 원추형으로 둘러싸게 되는 가는 나뭇가지 및 그것들을 덮어 외풍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덮개가 전부이므로(그림 18, 그림 19), 실내는 가족 수에 따라 만든 적당한 크기의 원형으로 된 평면이다.

 

생산을 위해 임시로 지은 집이므로 실내에서의 생활은 그 구조만큼 단순하다.

실내에서 주로 일어나는 생활은 주로 취침이며 비가 오거나 야간을 제외하고는 실내가 어둡고, 좁기 때문에 대부분의 활동은 옥외에서 이루어진다. 취침은 남쪽 방향에 낸 입구를 중심으로 한 동, 서 양쪽과 북쪽에 침상을 만들어 취침을 한다.

침상은 나무판이나 풀을 두껍게 깔고 그 위에 가죽을 깔아 만든다. 취침을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위계가 있는데, 북쪽 침상에 연장자가 누우며, , 서 양쪽에 젊은 사람이 눕는다. 가운데 중심부에는 불을 피울 수 있는 장소가 있어, 비가 오거나 야간에 벌레를 쫓기 위해 연기를 낸다.

식사 및 취사는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데 취사는 주로 “쪼우꿔[弔鍋, 조과](걸이에 매달아 사용하는 솥)”를 나뭇가지로 만든 지지대에 걸어서 한다.(그림17, 그림21) 생산물인 물고기를 건조시키고 가공하는 일들은 집 밖의 야외에서 행해진다. 고기잡이할 때 필요한 용구들도 야외에 보관한다.

4.2. 후루뿌[胡如布, 호여포]

후루뿌[胡如布, 호여포]는 원시혈거의 발전형이라 할 수 있는 반지혈 주거로, 지하로 70~80cm 깊이로 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골조가 될 나무기둥을 세우며 용마루와 서까래가 있는 흙벽으로 된 집이다. 후루뿌는 촬라앙쿠와 같은 임시주거는 아니지만, 장기 거주용 주거도 아니다. 겨울철에 어렵생활을 할 때, 생산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짓는 주거이며 보통 길어야 2년 정도 거주한다.

 

실내는 방형인 한 칸의 개방형 평면으로 되어 있어, 반 칸은 부엌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반 칸에는 캉[, ]이나 침상을 놓는다.(그림 24) 화로는 중간 바닥에 놓고, 캉의 화구와 연결된 굴뚝은 지붕 위로 난다. 그릇장, 물항아리는 부뚜막 옆에 있다. 따라서 취침은 캉 위에서 머리를 벽 쪽이 아닌 바닥 쪽에 두고, 화구에 가까운 즉 따뜻한 곳에 연장자가 눕고 화구에서 먼 곳에 젊은 사람이 눕는다.

개방형 평면이므로 취사와 취침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지만, 취사 행위는 입구와 부뚜막이 있는 곳에서 행해지며, 식사 행위는 캉 위에서 상을 놓고 이루어지므로 분리되어 있다. 후루뿌는 보통 겨울에 거주하는 집이나, 여름까지 거주할 때에는 지붕에 흙을 덮어 우기에 대비하기도 한다. 여름에는 집 밖에 별도로 부뚜막과 물을 쓰는 공간을 마련하여 취사 행위를 실외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4.3. [, ]

[, ] 및 정방[正房, 정방]은 허저족의 고정식 주거로, 쭤는 후루뿌가 지상으로 올라온 형태이며, 일반적인 초가와 달리 남쪽이 측벽이 되는 맞배지붕의 집으로 중국에서는 이러한 집을 일컬어 마쨔즈[馬架子, 마가자]라 한다. 쭤의 실내는 후루뿌와 같이 칸벽이 없이 하나의 방으로 되어 있어, 실내에서의 주생활은 후루뿌와 유사하다. 후루뿌보다 캉과 부뚜막이 고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취침과 식사 및 취사의 행위 장소의 구분은 더욱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캉은 후루뿌에서 일자형인 반면에 쭤는 동, 서 양측에 캉을 놓는다. 또한 부뚜막이 캉과 떨어져 있지 않고 캉과 인접하여 놓이게 되므로 따로 화구가 없이도 부뚜막의 화기가 캉 밑의 연도를 통해 돌면서 캉을 데우게 된다. 쭤는 춰뤄앙쿠나 후루뿌와 같은 임시주거가 아닌 거주용 주거이므로 실내에서의 생활 행위의 빈도수는 높아진다. 취침과 식사는 캉 위에서 이루어지고, 식사 시에는 상 주변에 캉 안쪽으로 연장자가 앉고 젊은 사람은 캉 바깥쪽에 걸터앉는다.

4.4. 정방[正房, 정방]

정방은 부유한 정도에 따라 칸 수가 차이 나는데, 가난한 사람은 한 칸이나 두 칸으로 된 초가에 거주하며, 보통 사람은 3칸으로 된 정방에 산다. 정방은 본래 허저족 전통적인 주거 유형은 아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게 된 정착식 주거로서, 일본 통치시기에 집촌(集村)정책을 실시한 후 강 연안에 살던 허저족을 강제적으로 마을을 이루게 하여 담장을 만들고 정착시켜 살게 하면서 보편화되었고, 이후로 생산에 따라 이주하던 생활방식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타민족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정방을 도입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쑹화강 유역의 허저족은 경제발전이 타지역에 비해 빨라, 이민족에게 쉽게 개방되어 200~300년 전부터 초가로 된 정방에 살게 되었다. 그 외에 지역에서도 부유한 일부 허저족은 20세기 초부터 세 칸이나 다섯 칸으로 된 정방을 짓고 살았다.

두칸의 내부(그림 26), 한 칸은 정옥(正屋)이고 다른 작은 칸은 부엌이다. 세 칸의 정방일 경우 가운데 칸이 부엌이고 나머지 두 칸이 정옥이다. 정옥의 내부 3면은 부엌과 이어지는
문이 있는 면 외에는 모두 캉이 있다. 즉 남캉, 북캉, 서캉이다.

정방에 거주하는 허저족의 실내 생활은 대부분 캉에서 행해진다. 캉 위에는 루씨[蘆蓆, 노석](갈대로 만든 자리)를 깔고, 의자는 사용하지 않고, 캉 위에 놓는 상만 있다. 삼면의 캉 사이에도 위계가 있다. , 서캉은 손님을 위한 자리이고, 남캉은 그 집의 주인을 위한 것이며 북캉은 낮은 사람을 위한 것으로 서캉이 가장 존엄한 자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조상을 모시는 것은 모두 서캉에서 한다. 부유한 집의 3칸 정옥에서는 서쪽의 한칸을 상옥(上屋)이라 하여, 집의 주인이 거주하고 또한 캉과 캉 사이에는 커텐 등으로 막을 쳐 격리시켰다. 남북 2캉의 양 끝에는 궤를 놓아 그 위에 이불 등의 물건을 놓는다. 서캉에는 귀중한 물건만 놓는다. 서쪽 벽 위에는 조상의 위패나 다른 신상을 모신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위계와 질서는 현재에는 거의 사라졌으며 서캉을 생활의 편리를 위해 제거하기도 하고 동옥(東屋)은 연도가 지나가는 내부칸막이를 설치하여 방을 개조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정방은 앞서 살펴본 주거 유형과 달리 엄격하게 벽으로 구분된 부엌이 있으므로 취사 및 물을 쓰는 행위가 다른 생활을 하는 장소와 명확히 분리되어 있다. 즉 부엌에서 취사 행위가 이루어지며, 음식물을 조리하고 개수하고 보관하는 장소들이 구분되어 질서가 있다.(그림 29)

1.5. 민 속

5.1. 주거상황과 주거민속의 생산

“하얼빈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말리는 곳”이라는 의미의 만주어로 헤이룽쨩성[黑龍江省, 흑룡강성]에 속한다. 헤이룽강은 북쪽으로 러시아와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이 강의 빛이 흑빛이어서 헤이룽강이라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헤이롱쨩성의 흙은 전체적으로 검은 색을 띠고 있다고 한다.

허저족에 대한 주거민속의 답사는 2003년 7월 8부터 7 10일까지 이루어졌다. 7 8 8 하얼빈9哈爾濱, 黑龍江省) 출발하여 12시 30 이란현[依蘭縣, 의란현]에 도착하였는데 하얼빈으로부터 2시간 30분 정도는 평원으로 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으며 콩과 옥수수를 주로 심으며 벼농사도 짓는다. 『삼국지』의하면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로부터 천리 떨어져 있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와 접하며 서로는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으며 그 넓이가 2천 리에 이른다. 높은 산이 있고 큰 호수가 있으며 동이의 땅 중에서 가장 평평하고 넓다. 토지는 오곡을 심기에 적당하며 오과(五果)는 생산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약수는 지금의 헤이룽강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부여의 땅은 현재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길림성]과 헤이룽쨩성 일대임을 알 수 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밭을 보면서 『삼국지』의 동이의 땅 중 가장 평평하고 넓으며 오곡을 심기에 적당하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농경지가 매우 넓어 집에 가서 쉬고 다시 일터로 나오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농경지 가운데 러시아풍의 뾰족한 빨간 지붕의 집들을 지어 쉬는 곳으로 이용하는데 이 집들은 초록색의 들판과 어울려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이 광활한 들판에서 보이는 나무는 오직 버드나무와 백양나무뿐이다. 이 나무들은 한재와 냉해를 잘 견디는 나무이기 때문에 이곳에 살아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버드나무는 밭의 중간에 포기포기 자라고 있고 백양나무는 밭의 주변에 일직선으로 심겨져 방풍림으로서 역할을 한다. 버드나무는 만주족신앙에 있어 여성신으로 시조신이며 산신(産神)숭배를 받고 있으며 백양나무는 꿋꿋한 의지를 가진 남성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한다. 이는 가뭄과 추위 속에서도 생명력을 가지고 번성하는 이 나무들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2시간 30분 정도가 지난 후부터는 산세도 높아지고 자작나무가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진쨩대주점[錦江大酒店, 금강대주점]에 숙박을 정하고 이곳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식당의 각 방이 숙신, 읍루, 말갈, 물길 등의 이름이 붙여져 있어 과연 허저족 지역에 와 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9일 아침에는 청나라 때의 절인 즈윈사[紫雲寺, 자운사]에 들렀고 1시 30 퉁쟝[同江, 동강]에 도착하였다. 선전부의 띵[, ]과장과 허저족 작가인 쑨위민[孫玉民, 손옥민] 선생이 마중을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 허저족의 상황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9일 오후에는 허저족박물관을 방문하여 춰뤄즈의 모형과 허저족의 역사, 신앙, 놀이, 생업 등에 대한 조사를 할 수 있었다. 10일은 퉁쟝시의 쩨진커우[街津口, 가진구]에 도착하여 여러 가정을 방문하여 주거민속을 조사하고 허저족문화촌(赫哲族文化村)을 조사하였다.

허저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퉁쟝은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며 여름에는 영상 30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겨울날씨는 하얼빈보다 4-5도 정도 낮다. 퉁쟝은 헤이룽쨩성의 동북 귀퉁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산세도 험하고 기온도 낮아 농사를 짓기에는 부정당하다. 정착생활을 시작한 지금도 90%가 어업이며 10%가 농업에 종사한다. 허저족은 대대로 이동식 생활을 해 왔으며 쑹화강[松花江, 송화강], 우쑤리강[烏蘇里江, 오소리강], 헤이룽강[黑龍江, 흑룡강] 유역에서 어렵에 종사해 왔으며 집은 강의 범람을 피하여 강변의 높은 곳에 지었다.

요우위파[尤玉發, 우옥발]는 허저족의 주거형태의 변화를 그림으로 보여 주었고 그에 대한 설명도 해 주었다.


그림의 왼쪽부터 춰뤄즈, 후루뿌, 마쨔즈, 정방, 무커렁이다. 춰뤄즈는 나무가지를 세워 만들기 때문에 수직으로 선을 그어 나무가지를 세운 것을 표시하였다. 허저족의 주거형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후루뿌(움집)는 밑을 둥글게 표현하여 땅을 파고 땅속에 거주하였음을 표현하였다. 겨울철 주거형식으로 정착생활을 할 때 사용한다. 마지아즈의 경우는 대문 위쪽에 있는 두 개의 창문을 강조하였다. 마쨔즈는 나무를 촘촘히 세우고 흙을 바르는데 나무를 붙여서 세울수록 집이 단단하게 만들어진다. 대문이 있고 대문 양쪽에 창문이 있다. 해방 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해방 전에 한족, 허저족, 중국동포가 모두 마쨔즈를 짓고 살았는데 이는 허저족의 영향이다. 현재는 허저족이 사는 곳인 우쑤리강, 쑹화강, 헤이룽강 일대에 있다. 정방은 한족식의 집으로 현재 볼 수 있는 지상에 벽돌을 이용해 지은 집이다. 흙으로 지은 집이라 하여 투팡즈[土房子, 토방자]라고도 한다. 무커렁은 귀틀집으로 통나무를 수평으로 놓아 만든 것이다. 마쨔즈는 나무를 세워서 만든 것이고 무커렁은 나무를 눕혀서 만든 것이다. 요우위파는 해방 전인 1950년대 이전에는 추오루오즈, 후루뿌, 마지아즈가 있었으며 무커렁과 정방(正房)은 해방 후에 들어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허저족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일 것으로 보이나 온돌을 한 것은 한족과의 접촉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노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70-80년 전부터 온돌 사용하였으며 현재의 집은 한족의 집과 차이점이 없다”고 하였는데 1934년의 조사인 점을 감안할 때 대략 1850년대부터 한족식의 정방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요우위파의 어렸을 때의 경험에 의하면 수렵을 할 때는 춰뤄즈에 거주하였으며 일본이 침입해 왔을 때 후루뿌에 거주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일본이 침입했을 때 일시적으로 후루뿌에 거주한 것이며 이미 이때도 후루뿌에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허저족은 마을을 형성하여 집단거주하지 않으며 강변에 4-5집 정도가 모여서 거주하며 현재와 같이 집단거주를 하게 된 것은 이주정책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예전에는 3-4집이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았고 많아야 10집이 함께 거주하였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 볼 때 허저족은 예로부터 어렵에 종사하였으며 따라서 물고기를 따라서 이동하는 생활이 주가 되어 임시성 가옥이 발달하였으며 정착형은 가옥은 최근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이동식 생활을 하였음을 음식을 해먹는 솥을 거는 기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농경이 중심이 되는 정착민들은 돌을 땅에 박고 그 위에 솥을 올리는데 반하여 이들은 나무가지 세 개를 꼭대기를 묶고 밑을 삼각형으로 펴서 나무가지에 솥을 건다. 땅에 북박이를 하는 것보다는 이동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생활이 중심이 되는 이들에게서 농경민의 정착시 주거에서 나타나는 민속만큼 다양한 민속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집은 필요에 따라 짓고 물고기가 이동하면 허물고 새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집에 대한 신앙은 발달하기 어렵다. 그리고 정착식 가옥은 아직 역사가 짧기 때문에 새로운 민속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5.2. 소수민족정책과 미신

추운 날씨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얼굴에 긴 털이 남아 있다. 한족들에게 물어보니 허저족은 목과 뺨 아래쪽에 긴 털이 남아 있으며 한족과 결혼하면서 털이 많이 적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이 전반적으로 길고 턱이 뾰족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매우 무뚝뚝하다. 남자들은 매우 건장한 편이다. 퉁쨩에서 만난 중국동포의 경우에도 매우 건장하고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어 중국동포라는 생각을 하기 힘들다. 그쪽에서 한국말을 하고 접근해 오기 전까지는 현지민으로 생각하기 쉽다. 현지의 풍토와 음식에 의해 체형이 쉽게 변화함을 알 수 있었다.

주거민속은 6명의 제보자를 중심으로 조사를 하였다.

쑨위민[孫玉民, 손옥민] 42세이며 남자이고 허저족이다. 부인은 43세이며 한()족이고 허저족박물관에 근무하는 딸이 있다. 2003년 7월 10 오전 9 10에 헤이룽쨩성[黑龍江省, 흑룡강성] 퉁쨩시[同江市, 동강시] 쩨진커우향[街津口鄕, 가진구향]에 있는 집을 방문하여 조사하였다. 평소에는 농사를 지으며 소설도 쓴다. 허저족 사회에서는 꽤 알려진 소설가라고 한다. 외부에서 조사단이 온 경우 자주 접대를 한다고 한다. 허저족 민속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으며 미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우위파[尤玉發, 우옥발] 68세이며 남자이며 허저족이다. 2003년 7월 10 오전 9 50에 헤이룽쨩성[黑龍江省, 흑룡강성] 퉁쨩시[同江市, 동강시] 쩨진커우향[街津口鄕, 가진구향]에 있는 집을 방문하여 조사하였다. 6살 때 이곳에서 50리 떨어진 남쪽으로 이주하였다가 3년 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계속 거주하였다. 조상도 모두 허저족이고 자손들도 모두 허저족이다. 키는 1m 75cm 이상되어 보이며 매우 말랐고 얼굴이 길고 광대뼈가 나왔으며 눈은 세모모양이다. 건축공사장의 잡부로 일 했었다.

여우찐위[尤金玉, 우금옥] 70세로 남자이며 허저족이다. 2003년 7월 10 오전 10에 헤이룽쨩성[黑龍江省, 흑룡강성] 퉁쨩시[同江市, 동강시] 쩨진커우향[街津口鄕, 가진구향]에 있는 제보자의 집을 찾아 조사하였다. 농민이다. 제보자는 허저족의 민족에 대하여 비교적 잘 알고 있었으며 미신이라는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우꿔이춘[尤桂春, 우계춘] 61세로 여자이며 허저족이다. 2003년 7월 10 오후 2 10 헤이룽쨩성[黑龍江省, 흑룡강성] 퉁쨩시[同江市, 동강시] 쩨진커우향[街津口鄕, 가진구향] 쨩토우거[江濤閣, 강도각] 식당 부근의 헤이룽강강변에 있는 반움집을 찾아 조사하였다. 어업과 농업을 겸한다.

삐춘썽(畢春盛) 61세로 남자이며 허저족이다. 2003년 7월 10 오후 4에 헤이룽쨩성[黑龍江省, 흑룡강성] 퉁쨩시[同江市, 동강시] 쩨진커우향[街津口鄕, 가진구향]에 있는 제보자의 집을 찾아 조사하였다. 1946년 퉁쨩에서 쩨진커우로 이주하였다. 정부관리였으나 퇴임하였으며 전통민속에 대해 미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 같은 나이계산법, 즉 태어나면서 한 살을 먹는 나이계산법을 사용한다.

위의 제보자들을 만나면서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자신의 민속을 미신이라 폄하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자민족의 문화를 미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소수민족정책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하나의 민속을 제보한 후에는 반드시 미신이라는 말을 붙였다. 아마도 미신(?)을 제보했을 경우에 오는 불이익에 대한 걱정과 또 하나는 이미 이들이 한()족화되어 자민족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허저족은 일본군이 침입하였을 때 팔로군(八路軍)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죽었다. 1950년 인구조사를 했을 때 320명밖에 남지 않았다. 현재는 4000명인데 그 중 1000명만이 순수한 허저족이고 나머지는 타민족과의 혼혈이다. 결혼에 대한 문제도 애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한족이나 만족과 결혼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민족에 대한 정체성은 점점 소실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1950년 이후 허저족의 전통 신앙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한족과 잡거하고 공산당의 정책에 의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조사한 노인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신앙을 미신이라 하였다. 조사한 내용들은 10살 전후한 시기에 본 것들로 그 이후에는 모두 사라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1950년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민속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무당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과학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본인들이 생각하는 과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대답은 하지 못하였으나 이들이 과학과 미신을 구분하는 기준은 중국 공산당이 허용하는 것은 과학이고 허용하지 않는 것은 미신임은 여러 가지 상황들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방문한 여러 집에서 재물신과 거울을 걸어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만난 소설가는 필자가 허저족의 가신신앙에 대해 질문을 하였을 때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의 집의 벽을 가득 채운 재물신과 대련(對聯)을 가리키며 “저것은 미신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였는데 그는 “미신이 아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는 허저족 자신의 전통문화를 모두 미신이라 하여 말하기를 꺼려하였으며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그밖에도 복()자를 붙이고 종이로 마든 표주박을 걸어놓았는데 이것들은 모두 미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족의 이주와 함께 들어온 한족의 가신신앙은 미신이 아니며 자신들의 신앙은 미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허저족은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과는 다르게 발랄함을 발견할 수가 없다. 매우 침울하고 표정이 없었으며 자민족의 문화를 빼앗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허감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50여 년 전에 사라진 민속을 조사하다보니 정확한 대답도 들을 수 없었으며 거기다가 미신이라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답은 지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답사를 통하여 조사한 내용과 문헌자료를 이용하여 허저족의 가신신앙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5.3. 문신신앙과 주거민속

(1) 거울

퉁쨩에서 거울을 집으로 들어가는 문의 입구에 건 경우를 몇 집 발견할 수 있었다. 여우꿔이춘은 “거울은 집을 지을 때 건 것으로 그 후에 다로 교환하지는 않는다. 거울을 거는 것은 거울에 비춰 나쁜 것을 몰아내기 위함이다. 길상의 의미이며 다른 의미는 없다.”고 하였다. 쑨위민은 허저족의 경우 거울을 문에 거는 습속은 없으며 이는 한족의 풍속이라 한다. 한족의 풍속을 따라 거울을 걸기는 하나 구체적인 의미는 모르는 듯 하였다. 거울을 건 집도 거의 발견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 최근에 시작된 풍속임을 알 수 있다.

만주족, 한족, 중국동포의 집에서 모두 거울을 거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7 8오후 2 45 하얼빈의 통이푸[同義福, 동의복]의 한족집은 창문 위에 원형의 작은 거울이 걸려 있었는데 앞집의 굴뚝이 보이기 때문에 걸었다고 한다. 7 9일 이란현[依蘭縣, 의란현] 안칭항[安慶巷, 안경항]의 짜오쩐쭝(趙振忠) 가옥 근처의 민가 경우에도 동그란 거울이 창문 위에 걸려 있었다. 길을 가는 노인에게 물으니 굴뚝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중국동포인 박식춘 가옥을 조사하였는데 이 집은 집으로 들어가는 문의 옆쪽에 거울이 있었는데 거울을 벽에 건 것이 아니라 벽채 안에 고정되어 있었다. 집을 지을 당시에 거울을 고정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 굴뚝이 없으며 문의 입구에 걸었다. 거울은 지름이 5cm가량 되는 작은 원형의 것으로 남방에서는 커다란 거울을 이용하는 것과는 비교가 된다. 거울의 중요한 기능은 나쁜 기운을 비추어 반사시키는 조벽의 기능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굴뚝이 있는 경우에는 거울을 굴뚝과 마주보는 위치에 걸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창문이나 문 위에 거는데 그 구체적인 기능에 있어서는 모두 조벽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표주박

한족의 영향을 받아 표주박을 거는 집들이 있다. 여우꿔이춘의 집의 경우 들어가는 문의 입구와 창문에 표주박을 달았다. “단오절에 걸었으며 표주박이라 부르며 허저족의 다른 이름은 없다. 1년을 잘 지내게 해 달라는 의미로 건다. 길거리에서 샀으며 1원이다. 다른 사람이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산다”고 한다.

표주박을 거는 것은 헤이룽쨩앙성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습속이다. 7 9일 숙박을 한 진쨩대주점[錦江大酒店, 금강대주점]의 경우 카운터와 복도 입구에도 걸려 있었다. 한족 왕쑤춘[王樹春, 왕수춘] 가옥의 경우에도 표주박을 걸었다. 5월 단오에 걸었으며 인류번성과 자손번성을 위해 건다”고 하였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는 종이로 접어 만든 표주박 모양의 것이 걸려 있는데 진분홍과 노란색이며 술이 달려 있다. 중국동포인 박식춘의 경우 한족들은 집으로 들어가는 문 입구에 거는데 집 안의 장롱 앞에 걸었다. 한족의 습속을 받아들이면서 변형된 경우라 하겠다. 한족이 문 입구에 걸어 복을 부르는 기능을 하는데 반하여 중국동포의 경우는 장식적인 의미에서 걸어논 것임을 알 수 있다.

(3)

단옷날 쑥을 뜯어다 건다. 걸어놓은 쑥이 대문 옆벽에 걸려 있다. 여우꿔이춘의 집에서는 단옷날 걸어놓은 쑥이 아직도 걸려 있다. 쑥을 새끼처럼 꼬아 둥글게 말아 놓은 것을 화성(火星)이라 하는데 이 또한 대문에 걸려 있었다. 화성은 여름철에 모기를 쫓을 때 사용한다. 단오에 해가 뜨기 전에 들에 가서 쑥을 뜯은 후에 집으로 돌아와 불을 붙여 집안을 한 바퀴 돈다. 그 후에 쑥을 걸어놓는다. 유유꾸이춘의 경우에도 “단옷날에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건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습속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미신이라”하여 부정하는 태도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쑥을 대문에 거는 습속은 단오와 관련이 있는 행사로 한족의 영향으로 단오절을 받아들이면서 쑥을 거는 습속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문지방

유우위진에 의하면 허저족어로 우르커트렁쿤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르커”는 문지방이란 뜻이고 “트렁쿤”은 위대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따라서 문지방을 밟으면 안 된다. 문지방이 위대하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5.4. 가신신앙과 주거민속

허저족의 전통 가신신앙은 이미 사라진 민속이다. 이미 50년 전에 사라진 민속으로 제보자들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해 일부를 조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가신신앙 부분은 과거의 가신신앙과 요즘 세롭게 등장하고 있는 가신신앙을 나누어 서술하도록 하겠다.

(1) 과거의 가신신앙

허저족은 매우 많은 종류의 신을 모셨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허저족박물관이나 허저민족문화촌(赫哲民族文化村)에서나 볼 수 있다. 2003년 7월 10 오후 3에 퉁쨩시 쩨진커우향(街津口鄕)에 있는 허저민족문화촌(赫哲民族文化村)의 샤먼의 집을 조사하였다. 집의 구조는 정방의 형태로 남향이며 벽은 짚을 꼬아 벽체를 만든 다음 흙을 붙였다. 초가지붕이며 굴뚝이 집 안에 있다. 서쪽방이 중요한 방으로 모든 신들이 서쪽방에 진열되어 있었다. 신상은 대부분 남녀가 쌍으로 모셔져 있다. 통나무로 깎았는데 몸체는 그대로 두고 얼굴부분만 조각하였다. 얼굴에 파란색을 칠한 것이 특징이다. 신의 앞에는 향을 피우기 위한 나무로 만든 사각형의 향로가 놓여져 있다. 샤먼의 집에 진열된 신들은 집 안에 모시는 신 외에도 천신 등이 모셔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샤먼의 집에 전시되어 있는 신들과 문헌자료를 통하여 과거 허저족이 신앙하였던 가신들에 대하여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1) 서쪽숭배

동북의 소수민족들은 서쪽을 숭배한다. 한족이 동쪽을 숭배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루며 현재에도 이러한 규율은 잘 지켜지고 있다.

링춘성[凌純聲, 릉춘성]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푸커진[富克錦, 부극금]이란 곳에서 가난한 사람인 쑤스[蘇什, 소십]의 집을 조사하였는데 온돌은 위치에 따라 존비의 차이가 있으며 서쪽 온돌은 손님이며 남쪽 온돌은 주인이고 북쪽온돌은 노비로 서쪽온돌은 가장 존경을 받는 곳으로 손님을 모시며 조상에 대한 의례도 모두 이곳에서 거행한다. 부자인 경우 3칸 집인데 서쪽칸이 높은 곳으로 어른이 이곳에서 거주한다. 서쪽 온돌의 신감에는 존경하고 귀중한 물건을 올려놓는데 가장 위쪽에 조상신을 비롯한 각종 신위를 올려놓는다.”고 하였다.

서쪽이 귀하다는 관념은 화장실의 위치를 결정지었다. “부자인 경우 화장실이 남녀의 구분이 있다. 남자 화장실은 서쪽에 있고 여자 화장실은 동쪽에 있다. 여자가 서쪽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기한다. 서쪽에는 신을 모시고 있는데 여자가 월경을 할 경우 신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 동쪽에 화장실을 짓고 남녀가 함께 사용한다. ” 현재 허저족의 화장실은 쑨위민 가옥의 경우에도 화장실이 동북쪽에 위치한다.

“매 계절마다 수렵을 떠나기 전이나 수렵을 하고 돌아온 후에 서쪽온돌에서 가정제를 지내 신에게 감사한다. 이때 제사를 지내는 신의 종류는 매우 많으며 조상신도 이 안에 포함된다.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신의 신상은 모두 서쪽 온돌 위에 모신다. 향을 피우고 술을 바치는데 남자들은 웃어른부터 어린순서로 방바닥에 꿇어앉는다. 샤먼이나 불교의 승녀를 불러 신에게 제사를 지냄을 알린다.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술을 바치고 향을 피웠으니 신이 어서 강림하라’는 내용이다. 처녀는 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며 제사를 지낼 때는 밖으로 피해야 한다.

여우위찐의 경우 “어렸을 때 후루뿌에 살았으며 온돌은 북쪽에 있었다. 그 후에 정방에 살았는데 동족과 서쪽에 온돌이 있었으며 서쪽은 젊은 사람이 거주하고 동쪽은 노인과 이이들이 거주하였다. 종이에 조상의 이름을 써서 동족에 모셨다. 동족이 크고 서쪽이 작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특별한 예로 이들이 한족문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한족이 허저족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2) 천신(天神)

허저민족문화원의 공원에 전시되어 있었다. 크기는 1m50cm는 되어 보였으며 나무로 만들었고 고동색을 칠하였다. 실제 크기는 30cm가량일 것으로 보이며 전시를 위해 크게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큰 사람이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서 있고 그 밑에 작은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다.

“허저족어로는 빠언뚜리(巴恩都力)라 한다. --이 신에 관한 신화가 있는데 언두리는 진흙으로 큰물고기를 만들고 10여 명의 사람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 비가 내려 언두리는 진흙으로 만든 사람이 망가질까봐 물고기의 입 속에 넣었다. 날이 맑은 후에 사람들이 물고기의 입에서 나왔다. 따라서 인류가 시작되었으며 그 공은 천신의 창조와 물고기의 생식력에 의한 것이었다.” 언두리는 허저족의 창조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3) 조상신

현재 조상신을 모시고 있는 경우는 발견할 수 없었다. 링춘성의 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나무로 두 개의의 인형을 깎는데 길이는 28cm로 곰의 가죽을 몸 안에 넣는다. 머리는 평평한 것은 남자이고 뾰족한 것은 여자이며 모든 조상을 대신한다. 허저족어로 sagdi mafa라 하는데 직역하면 위대한 조상님(大老人)이라는 뜻이다. 서쪽벽의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제사를 지낼 때는 서쪽 온돌에 다른 신들과 함께 올려놓는다.”라고 하였다.

샤먼의 집에 전시된 조상신은 크기가 28cm정도이며 얼굴 부분만 조각하였고 파란색을 칠하였다. 역시 머리가 평평한 것은 남자이고 뾰족한 것은 여자라고 한다.

4) 조왕신

현재 조왕신을 모시는 경우는 없다. 여우꾸이춘의 경우 “50년 전에는 조왕할아버지가 있었으나 본인은

 

 

 

모셔본 적이 없다. 조왕할아버지는 남자이다. 남자가 모신다. 12 23일에 올라가 평안을 빈다. 어두워진 후에 만두와 술을 바친다. 절을 두 번 한다. 제사를 지낸 후에 새로운 것으로 갈아붙인다. 부엌의 솥 위에 종이에 그림을 그려 붙여 놓았었다.”고 하였다. 여우위찐의 경우는 “12 23일 모신다. 만두, 술을 준비. 해가 진 후에 전을 3번 한다. 조상신은 주방 위에 있으며 남자가 모신다”고 하였다.

조왕신의 남신으로서의 성격이나 제의를 통해 볼 때 한족의 영향으로 거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50년 전에 이미 소멸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방산신(房山神)

위의 링춘성의 보고서에 의하면 “정수리가 평평한 것은 남신이고 26cm이다. 정수리가 뾰족한 것은 여신이고 29cm이다. 평소에는 방산(房山)의 서쪽에 모시며 주택의 평안을 관장한다.” 샤먼의 집에 전시된 방산신 중 여신은 머리가 뾰족하지 않고 둥근 모양이다. 집의 평안을 보호하는 신이다.

6) 사귀신

링춘성에 의하면 남자는 32cm이고 여자는 36cm이다. 샤먼의 집에 전시된 사귀신은 남자는 머리가 평평하고 여자는 뾰족하다.

7) 벽사신

링춘성에 의하면 남신은 49cm이고 여신은 52cm이다. 이 신은 다른 신과 다르게 다리가 표현되어 있다. 여신의 경우에는 다리가 하나 없다.

 

8) 산협신(山峽神)

링춘성에 의하면 머리가 9개의 작은 신이 있는 것은 남신이고 머리가 뾰족한 것은 여신이다. 모두 34cm이다. 아래 사진은 샤먼의 집에 전시되어 있는 산협신으로 남신의 머리 위에 관을 쓴 것과 같은 것이 9명의 작은 신이다.

9) 폐병신

링춘성에 의하면 뾰족한 머리에 높이는 약 49cm이다. 두 손과 두 발이 있으며 가슴에는 갈비뼈를 새겨 병에 걸려 쇠약해진 몸을 표현한다.(그림37)

10) 복통신(腹痛神)

링춘성에 의하면 36cm이고 4다리가 있는 짐승이 등에 작은 나무로 만든 신을 태우고 있다.(그림38)

11) 두통신

링춘성에 의하면 3개가 있으며 하나는 크기가 20cm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는 있으나 몸통이 없다. 나머지 하나는 22.5cm이다. 머리가 아플 때는 머리만 있고 몸통이 없는 것을
물항아리에 넣으며 통증이 멈춘다고 한다.(그림39)

 

12) 동물신

링춘성에 의하면 모든 동물은 모두 자신의 신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의 경우는 말신이 있는데 한 묶음에 9개로 규정되어 있으며 크기가 각자 다른데 큰 것은 19cm이다. 호랑이 신의 경우 길이가 11cm이고 늑대신은 16.5cm이며 개신은 19cm이고 멧돼지신은 21.5cm이고 돼지신은 18cm이고 자라신은 12cm이고 용신은 12.5cm이고 두꺼비신은 4.4cm이고 고슴도치신은 12cm이 있다. 신들은 평소에는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다가 수렵을 할 때 이 주머니를 들고 가며 가제를 지낼 때 이 신들을 진열해 놓고 제사한다.(그림40, 그림41)

 

13) 사귀신

샤먼의 집에 모셔져 있다. 남녀 쌍으로 모시며 다른 신과 구별되는 별다른 특징은 없다.

14) 길성신

길성신 3명으로 중간에 있는 신이 가장 크다. 중간에 있는 신은 얼굴이 사면에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양쪽의 작은 신은 하나는 머리가 원형이고 하나는 뾰족하다. 죽은 사람을 데려가는 신이다.

15) 애래신(愛來神)

부부와 두 아이인 듯한 신이 모셔져 있다. 4사람 모두 다리가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아마도 사랑의 신인 듯 하다.

(2) 현재의 가신신앙

1) 재물신과 복자(福字)

쑨위민의 경우 서쪽벽에 재물신을 모셨다. 공희발재(恭喜發財) , “재물을 많이 벌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써 있으며 재물신 그림의 주변은 엽전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어 재물신의 특징을 더욱 살려주고 있다. 아래쪽에는 “축니 재원광진, 마도성공( 財源廣進, 馬到成功)”이란 문구가 써 있는데 그 의미는 “당신이 재물이 많이 들어오고 말이 도착하는 것처럼 성공을 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그림은 개인이 산 것이 아니고 기업에서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의 위쪽에는 “華龍面 天天見”이라고 써 있는데 그 의미는 “화룡면, 매일매일 만나요”라는 뜻으로 직역을 하면 “화룡면을 매일 먹으라는 뜻”이다. 이 그림은 화룡이라는 국수제품을 판매하는 회사에서 제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업이 민속과 결합하여 민속을 판매에 이용한 예이다.

여우위파의 집에도 재물신이 붙어 있는데 가운데는 재물신 그림이고 재물신의 뛰쪽에는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는 지폐가 그려져 있다. 재물신 가슴 부분에는 재만문(財滿門)이라 하여 재물이 문에 가득 찼음을 표현하였다. 재물신의 위쪽에도 재신도(財神到)라 써서 재물신이 이미 도착하였음을 알리고 재물신의 양쪽으로는 “재신도아가리래, 아가필정대발재(財神到我家里來, 我家必定大發財)”라 하여 재물신이 우리 집에 왔으니 우리 집은 반드시 크게 부자가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재물신 그림에서 재미 있는 부분은 아래 달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2003년과 2004년 것을 함께 넣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요우위진의 경우 부엌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에 부적이 붙어 있다. 서쪽벽에는 재물신이 그려진 그림이 붙어 있다. 설날에 붙인 것이다. 조상신의 자리에 재물신이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재물이 들어오라는 의미의 종이가 붙어 있다. 다른 신앙은 없으며 오직 재물신만이 모셔지고 있다. 비춘성의 경우 “재물신은 서쪽벽에 반드시 모시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서쪽벽에 붙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쑨위민의 경우 서쪽벽에 복()자가 붙어 있다. 삐춘성의 경우 서쪽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문련이 붙여져 있고 복자가 거꾸로 붙여져 있다. 문련에는 들어가는 쪽에서 볼 때 “頭見喜, 萬事勝憙”라는 글이 쓰여져 있는데 그 의미는 “머리를 드니 경사스러운 일이 보이며, 모든 일이 즐겁게 되다.”라는 뜻이다. 이 집에는 복자가 곳곳에 붙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자신들의 가신이 모두 사라지고 한족의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의식에서 자신들의 가신은 미신이고 한족의 것은 미신이 아니라는 발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상업이 민속을 이용하고 있다는 측면도 민속의 또 다른 변화라 할 수 있다.

2) 새신

헤이룽쨩성을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지붕 위에 비둘기들이 앉아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비둘기를 볼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양철로 비둘기 모양을 만들어 지붕 위에 올린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곳은 대체로 맞배지붕인데 용마루 위에 두 마리의 비둘기를 올렸다. 양쪽 끝에 올리는 경우와 지붕의 중간에 양쪽으로 두 마리를 올리는 경우가 있다. 비둘기의 모양도 앉아 있는 모양을 올리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더욱 생동감을 살려 날아가는 모양을 만들어 올리기도 한다. 최근의 새로운 경향은 빨간 벽돌에 양철지붕을 얹는 것인데 이런 집의 경우 새를 양쪽 용마루에 올리고 맞배를 한 곳에는 별을 달았다. 이러한 현상은 따싱안링[大興安嶺, 대흥안령]을 넘어 내몽고로 가면 한두 예를 제외하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헤이룽쨩성의 경우는 전역에서 거의 보인다. 여우꿔이춘의 집으로 가기 전에 양철 지붕 위에 새를 얹은 집이 있다. 중국동포의 가옥인 퉁쨩시 신꽝촌[新光村, 신광촌] 춘화개고기집(春花狗肉館)의 경우에도 비둘기를 양철로 만들어 올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둘기를 올리는 이유는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이는 요즘 그 의미를 잃어버린 후의 해석이다. “비둘기 신상을 허저족어로 커쿠라 한다. 신상은 두견새와 비슷하며 집 밖의 마당에 신간을 세우고 그 위에 올려놓는데 샤먼을 대신해서 말을 하고 샤먼에게 길을 알려준다. , 가을에 사슴신을 위하여 굿을 할 때 소년이 손에 비둘기 신간을 들고 신들의 앞에서 길을 이끈다. 비둘기를 올리고 있는 신간을 투오루오라 하며 용과 뱀이 그려져 있다. 과거에는 허저인의 집에서는 투오루어기둥 위에 말()을 올려놓아 까치에게 먹이는 습속이 있었으며 제사를 지낼 때는 말에 곡식을 담아 뿌리는 습속도 있었다. 새들이 날아와 곡물을 먹으면 조상과 신령의 와서 제사를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위의 내용으로 볼 때 예전에는 신간에 비둘기를 올리던 것(그림 44)이 지금은 가옥의 변화에 따라 양철로 오려 지붕에 올리는 형식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주의를 하여야 하는 것은 비둘기를 올린 신간이 한국의 솟대와 모양은 유사하나 한국의 솟대는 농경과 관련이 있고 허저족의 신간은 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허저족의 비둘기는 영혼을 운반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풍년의례와 관련이 있는 솟대와는 차이가 있다.

5) 물고기

허저족은 어렵을 생업으로 하고 있으며 황어의 경우는 중국의 황제에게까지 진상을 하였다고 한다. 황어는 바다와 담수를 오가는 물고기로 아주 맛있다고 한다. 20년 전에는 아주 많았으나 지금은 일 년에 1-2마리 정도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쑨위민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에 나무로 조각한 물고기가 손잡이에 묶여 있다. 특별한 의미는 없고 자신이 물고기를 좋아하여 조각한 것으로 겨울철에 손잡이를 잡으면 차갑기 때문에 물고기를 새긴 나무를 잡고 열기 위해 걸어놓은 것이라 하였다.

여우위파의 집의 경우에도 물고기모양의 장식품을 재물신을 모신 앞에 놓았다. 노부부의 모습인데 할아버지는 낚시를 하고 할머니는 커다란 물고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장식품을 놓은 위치가 재물신을 모신 자리인 것으로 보아 신성한 자리이며 커다란 물고기를 안고 있다는 것은 물고기가 신앙으로까지는 승화되자 않았다 하여도 길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5.5. 통과의례와 주거민속

(1) 산속

요우위진에 의하면 추오루오즈에서 생활하는 경우 아이를 낳을 때는 새로운 춰뤄즈[撮羅子, 촬라자]를 만든다고 한다. 허저족은 남존여비사상을 가지고 있다. “푸진현[富錦縣, 부금현] 쩨진커우촌[街津口村, 가진구촌]의 경우 임신한 여자를 더럽다고 생각한다. 산달에는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야 아이를 쉽게 낳는다고 한다. 사람이 죽은 곳에 가면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임산부가 죽은 사람을 보면 태어난 아이가 기가 없다고 한다. 혼례에 가면 안 되는데 네 눈으로 보면 신랑신부에게 안 좋다. 원래 거주하던 곳에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 겨울이라도 새로 집을 짓고 아이를 낳는다. 더러운 것이 조상이나 신령을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산모가 사용했던 물건을 버린다. 아이를 낳은 후 3일만에 일을 시작한다. 산모나 유아의 사망률이 높다. 산모가 아이를 낳은 곳은 매우 더러운 것으로 이곳에는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더러운 것이라 자신의 좋은 운을 뺏기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오루오즈를 다시 짓는 이유는 출산으로 인한 피부정으로 인하여 조상이나 신령들이 더럽혀 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아이를 보호해주는 신이 있다. 한국의 삼신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3일째 되는 날 반드시 이웃에 좁쌀밥과 물고기를 보낸다. 보내는 물건은 반드시 홀수로 보내야 한다. 음식을 받은 집에서는 천이나 짐승의 가죽을 돌려보낸다. 그리고 이 날 대문의 오른쪽에 귀퉁이에 백양나무가지를 세우는데 높이는 5척 정도 되며 중간에 사람의 얼굴을 새기며 그 아래에 쑹즈냥냥[送子娘娘, 송자낭낭]이라 써놓는데 허저어로 ɔmʃi mɒmɒ라 부르며 나무로 되어 있다. 가슴이 매우 튀어나와 있어 여성임을 표시한다. 백양나무 꼭대기에는 줄을 걸고 줄에는 나무로 만든 칼과 활을 거는데 그 사이에는 천이나 가죽을 거는데 허저족어로 ɔmɔsɑ ʧʻili라 한다. 이 줄은 백양나무에서 시작하여 방을 가로질러 커튼을 치는 나무기둥에 묶는다. 송자낭낭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밥을 바치고 향을 피우고 부인이 제를 올린다. 나무 국자에 미움을 담아 나무칼과 나무활과 천의 아래 부분에 미음을 약간 바른다. 그리고 미음을 입에 물었다가 아이의 얼굴에 뿌린다. 3일 동안 바친 후에 ɔmɔsɑ ʧʻili줄을 걷어 백양나무의 꼭대기에 걸어놓았다가 다른 아이가 태어나면 다른 줄로 바꾼다. 어린아이의 신은 송자낭낭 이외에 항상 아이와 함께 하는 신인 ɑgəɲɑtʻɑ가 있는데 나무로 만들었으며 하나는 44.5cm이고 다른 하나는 32cm고 두 발은 있으나 손은 없으며 아이가 2-3살이 되고 뭔가를 알게 되고 웃기 시작할 때 부모는 이 신의 엉덩이를 때려 아이에게 경고한다.

허저족의 탄생의례는 한국의 돌떡돌리기, 금줄치기, 삼신모시기 등에서 비슷한 면이 발견된다. 위의 송자낭낭의 경우는 한족의 영향으로 보이며 원래는 백양나무가 삼신으로서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보고에 의하면 “분만을 한 3일 후 서북쪽 벽에 버드나무로 만든 emshi-mama 혹은 omshi-mama를 모시는데 이 신은 삼신으로 아이의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는데 백양나무와 버드나무로 차이가 난다.

(2) 혼례

쑨위민과 요우위진에 의하면 신부가 신랑집을 들어갈 때 불을 피우고 뛰어 넘는다. 배를 타고 온 경우 몇 바퀴 돈 후에 신랑집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신부가 처음 신랑집에 들어올 때 불을 뛰어넘어 넘는 습속은 한국에도 있는 것으로 한족이나 만족의 영향으로 형성된 민속으로 보인다. 불을 뛰어넘거나 배를 몇 번 돌린 후에 들어오는 것은 혹시 가지고 왔을 지도 무르는 액운을 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제보자들에게 그 원인을 물었으나 제보자들은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하였다.

(3) 상례

노인이 돌아가시면 바닥에 나무판을 깔고 모신다. 여우꿔이춘은 시신의 머리는 문쪽으로 향하거나 북쪽으로 모신다고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를 동쪽으로 한다고 제보한 경우도 있는데 아마도 이미 사라진 민속이기 때문에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 볼 때 “시신은 서쪽에 목판을 걸고 그 위에 모시며 머리는 서쪽을 향하고 발이 동쪽을 향한다.”고 한다.

여우위찐에 의하면 3일 만에 시신이 문을 나갈 때는 다리가 먼저 나가는데 발로 걸어가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다고 한다. 여우꿔이춘은 관이 문을 나갈 때는 자식 부부가 그릇을 깨고 그 다음 시신을 운구하여 나간다고 하였다. 이 풍속은 한국에도 있는 풍속으로 한족의 영향이다. “시신을 방에서 내갈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3바퀴를 도는데 이 때는 곡을 멈춰야 한다. 실내의 문지방 앞에 뿌리고 쓰레받기로 재를 덮고 머리가 밖으로 향하게 하여 나가며 실내에 있는 사람들은 쓰레받기를 밟으면 안 된다. 밖으로 시신을 내온 후에 염을 하고 관에 넣는다. 샤먼은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다시 되돌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음혼(陰魂)은 집에 남아 가족들을 해할 필요가 없다.’라고 노래한다. 쓰레받기를 덮었던 것을 들어 재에 나타난 발자국을 확인하는데 영혼이 나갔으며 띠에 해당하는 동물의 발자국이 문 밖을 향하고 있으며 반대로 되어 있으며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다.” 시체를 창문으로 내 가는 경우도 있다. 요우진위는 “죽은 지 남자는 7일 여자는 9일 되는 날 샤먼을 불러 굿을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집으로 와서 생활하는데 100일 또는 3년 되는 날 혼을 저승으로 보낸다. 이때까지는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불도 펴주고 3끼 식사도 대접한다. 샤먼을 불러 굿을 한다”고 한다.

허저족도 죽은 이의 영혼을 두려워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죽은 이의 영혼이 밖으로 나가도록 다리가 먼저 나가게 하고 그릇을 깨고 발자국을 확인하여 사자의 영혼이 집 밖으로 나갔음을 확인한다. 또한 샤먼을 불어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초도의식을 거행한다. 이러한 의례를 통하여 집은 신성한 공간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 중국경영정보연구소, 2005-2006.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