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Home     즐겨찾기/Favorites
     로그인/Login     가입/Join
 
Home
主页
학회안내
Orientation
介绍
학회자료
Data
资料
논문투고
Presentation Paper
论文投稿
관련단체
Link
链接
입회안내
Join Us
入会介绍
게시판
Community
论坛
통합검색
구들  |  김준봉  |  가스  |  %  |  사진  |  %E  2024년 03월 19일 화요일
게시판Community论坛 > 자유게시판
  동아시아사 인식과 동아시아사 교육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08-06-11 18:52   조회 : 32208        
[발표 1] 한국의 동아시아사 인식과 교육 - 동양사 연구 60년을 통해서 본 동아시아사 -
柳 鏞 泰(서울대)

2006년 11월 한국정부는 2012년부터 고등학교 역사교육에 “동아시아사”(선택)를 신설하고 중1-고1 사이에 이수하는 국민공통기본과목(필수)이었던 국사와 세계사(사회 속의 한 영역)를 통합하여 “역사” 과목으로 만들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지난 60년간 국사-세계사의 이분법으로 짜여진 역사교육이 역사, 세계사(과목명: 세계역사의 이해), 동아시아사, 국사(한국문화사)의 네 영역(그중 역사만 필수이고 나머지는 모두 선택이다.)으로 나뉘어져 시행되면 종래의 국사와 세계사라는 이분법체제를 넘어 국사와 세계사를 상호 관련지어 파악함으로써 국사의 자국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세계화 시대의 세계사 인식을 심화할 기회를 증진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우리학계의 연구성과는 지난 60년간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음에도 개별적인 각국사 연구의 집적에 불과하여 “역사”는 커녕 “동아시아사”를 조직하고 서술하기에도 충분한 정도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고 학계의 이런 연구경향이 역사교육에 그대로 투영되어있다. 연구도 교육도 이처럼 각국사 단위로 진행돼 온 상황에서 새로운 동아시아사를 구성해야 하는 우리의 상황은 역사교육이 역사연구를 앞질러 가는 형국이다.
현재 한국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 문맥에서 보면 동양사는 자국사를 뺀 아시아사를 지칭한다. 이에 비해 장차 신설될 동아시아사는 자국사를 포함한 지역사를 추구한다. 따라서 동아시아사의 인식과 교육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려면 이같은 동아시아사의 범위문제, 그리고 과연 동아시아사가 하나의 역사서술 단위로 성립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문제와 직결되는 고민을 일찍부터 심도 있게 한 선구적 사례는 李東潤의《동양사개설》(1953)이 아닌가 한다. 그는 “동양사는 보통 국사⋅서양사와 함께 세계사의 한 부문을 형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통일적 동양사의 조직방법에 관해 논의하지는 않았다. 통일적 동양사의 구성에 관해 尹世哲이 제기한 “비교사적 지역사로서”의 아시아사가 주목된다. 그는 통일적 아시아사의 구성이 이상적이지만 그 전단계로서 아시아사의 다원성을 전제로 문명권적 접근과 지리적 지역개념을 함께 고려한 지역사적 접근이 필요하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아시아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지역사인 동아시아사의 구성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서울文理大 교수인 金庠基와 그의 제자 高柄翊, 全海宗이 가장 일찍부터 관심을 두었다. 김상기는《東方文化交流史論考》(1948),《동방사론총》(1974), 고병익의《아시아의 역사상》(1969),《東亞교섭사의 연구》(1970),《東亞史의 전통》(1976),《동아시아의 전통과 근대사》(1984),《동아시아사의 전통과 변용》(1996),《동아시아문화사론고》(1997), 전해종의 《동아문화의 비교사적 연구》(1976),《東亞史의 比較硏究》(1987) 등의 일련의 저작을 통하여 요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역사라기보다 관계사와 교류사 중심으로 하는 연구를 보여주었다.
이렇듯 동양사학 연구 60년이 지나는 동안 관련 논문이 엄청나게 증가하였음에도 이를 종합하여 전체상을 하나의 체계 속에 파악한 저술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호소원의 근세 경험과 帝國意識에 뿌리를 둔 대국주의와 팽창주의를 극복하고 “통일적 아시아사”, 그리고 그 일환일 터인 “비교사적 동아시아 지역사”를 구성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정도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개별연구에 의해 교류/교섭사/관계사/비교사 연구가 축적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연스레 통일적 동아시아사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교류/교섭이나 관계사로 포착되지 않는 문제들, 가령 국가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교류관계에서 소외된 농민사회와 농민문화 등에 대한 비교사도 필요하다. 이런 개별연구의 시각과 접근법을 종합하여 하나의 체계 속에 조직하는 일은 또 다른 새로운 작업이다.
  이러한 연구 작업과 및 우리의 필요와 관련하여 모종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구성체제를 갖춘 예는 金庠基와  孫晋泰(서울文理大 교수)의 중등교과서《이웃나라의 생활: 역사》(1949, 1952), 그리고 蔡羲順의《동양사개론》(1948/1953)과 같은 교과서와 개론서  분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등학교 교과서인《이웃나라의 역사》(1946-54)는 동아시아 지역사에 가장 근접한 예로 그곳에서 반영된  “隣國意識”은 앞으로 우리가 동아시아 지역사를 구성할 때 소중한 자산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국의식”과 상충하는 “華夷意識”을 동아시아 4국이 오랫동안 공유해온 사실을 고의로 은폐하기보다 역사적 경험으로서 인정하고 직시하고 성찰하여 미래지향적으로 극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에 비해  대학교재인 《동양사개론》은 상대적으로 隣國을 홀시하고 있고 그것은 동양사를 세계사의 일환으로 파악한 위에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갖는 사실을 선정하여 내용을 구성한 결과였다.  이러한  인국의식은 그 뒤로 갈수록 박약해졌으며 이는 자국사와 세계사의 단절이 강화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뒤늦은 산업화와 탈냉전을 거쳐 점차 도달하게 된 이른바 “세계화” 추세의 반영이다.
그것은 희한하게도 동아시아의 산업화와 세계화 속에서 경제적으로는 동아시아 域內의 협력과 상호의존이 급속히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인식과 역사교육 면에서는 갈등과 분쟁이 오히려 증폭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 사이 동아시아 역사인식의 공유를 목표로 하는 공동역사교재들이 출간된 것은 소중한 성과이지만 인국의식의 강조에 지나치게 경도된 느낌을 준다. 화이의식을 바탕으로 한 상호소원의 역사가 직시되고 성찰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근대 중국과 근대 일본의 제국성이 극복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도 한국인이 제국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제국화에는 실패한 결과일 뿐 내면적으로 극복한 결과라 보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해야한다.
중국, 일본, 베트남이 18-19세기에 제국화한 결과 내포하게 된 소수민족 문제를 간과한 채 구성하려는 동아시아사는 중심국들의 역사일 뿐이다. 동아시아에서 韓中日越은 그 자체가 ‘중심’이다. 따라서 몽골⋅티벳⋅琉球라는 ‘주변’의 시각이 도입되지 않으면 제국성의 성찰과 탈피는 어렵고, 따라서 동아시아의 화해는 기대하기 어렵다. 한반도의 분단도 사실 주변 대국의 제국성에 의해 강요된 산물이니 한반도 통일이야말로 제국성이 일국차원이 아니라 동아시아 차원에서 극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한일 역사교사들이 공동으로 저술한《마주보는 한일사》(2005)는 편협한 국가주의를 벗어나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기 위해 지배자 중심의 정치사뿐 아니라 사회경제사와 민중들의 생활사까지 담았다고 하지만, 그 시야는 중심국 안의 민중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집필한《미래를 여는 역사》(2005)조차 이와 마찬가지이다. 2012년부터 사용될 한국의《동아시아사》구성체제가 작년 초 만들어졌으나 한중일월 4국 ‘중심’의 시각을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이는 동아시아 담론이 무성하였지만 그간 우리 동양사 연구의 성과를 면밀히 검토하는 사학사적 접근을 소홀히 한 결과 공소한 논의에 머물렀던 때문이 아닌가 한다.《동아시아사》의  구성체제는 나중에 조정하더라도 우선 내용서술을 위해 교과서 필자들은, 우리의 동양사연구의 功過를 따져 그 성과를 딛고 한 걸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역사상의 어떤 것도 언제나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고 한걸음 진전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그 發展體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발표 2] 일본 역사학계에 있어서 동아시아론의 현재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1. 머리말
  일본의 역사학계는 현재 큰 혼미 상태에 있다. 즉 1945년 이후, 일본의 역사학계를 주도해 온 이른바 전후 역사학이 1980년경을 전후해서 해체 상황에 빠지면서 다양한 조류의 연구가 생기는 가운데, 연구자의 문제 의식의 분산이 극단적으로 진행된 결과 연구사의 정리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 게다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서 역사를 둘러싼 담론에 있어서 역사 연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하게 저하하며 전문의 역사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의 담론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현실이 존재한다. 그러한 가운데 역사 연구의 존립 기반 그 자체가 요동하고 있는 것이다.
전후 역사학이 해체에 이른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고 있지만, 가장 큰 원인으로서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권의 해체를 드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고 생각된다. 전후 일본의 역사학계는 자본주의국가로서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강했으며 (나 자신도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인 연구자도 끊임 없이 그것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연구하는 일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중․소의 대립이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을 계기로 현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의문이 점차 강해지는 것과 동시에, 일본의 경제성장과 거기에 따른 사회의 큰 변화, 또한 한국이나 대만 등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경제의 본격화 등, 마르크스주의 진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진행되는 가운데, 역사 연구가 현실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게 되는 현상이 1970년대 이후 벌써 생기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권의 해체는 전후 역사학에 마지막 만종을 고하는 것이었지만, 그 이전부터 자기 해체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가 전후 역사학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는 것과 동시에, 사회사, 국민 국가론, 여성사 연구, 도시의 역사 등, 전후 역사학에서 경시 내지 무시되어 온 다양한 문제가 다루어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연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그 판단은 아직 시기 상조일 것 같다. 그야말로 백화 제방, 백가 쟁명의 상황이 계속 되는 한편으로, 시민의 역사 멀리하기, 보다 정확하게는 역사가(歷史家) 멀리하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1980년대부터 일본의 역사학 연구가 향해야 할 방향으로서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라고 하는 가설을 주장해 왔지만 (졸고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 『역사 평론』412, 1984년), 이 방향성은 더욱 더 유효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처음 이 주장을 시작했을 때에는 아주 미숙한 생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후 「동아시아 소농 사회론」 등의 연구를 진행시키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생각도 점차 명확해졌다. 따라서 이 보고에서는 근년의 일본사 연구의 동향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통사를 대상으로, 거기서 동아시아가 어떻게 말해지고 있는지를 검토한 다음,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가 어떠한 현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기로 한다.

2. 일본 역사학계에 있어서의 동아시아 이해
 1) 검토의 대상
  여기서 검토하려고 하는 것은 현재 이와나미 서점에서 간행 중인 ‘시리즈 일본 근현대사’이다. 이 시리즈는 전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시점에서 제8권까지가 간행된 상태이다. 각 권을 한 명의 집필자가 담당하는 형태로, 에도막부 말기부터 현재까지를 취급하고 있다.
이 시리즈를 검토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해서이다. 첫째는, 21 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간행된 본격적인 일본 근현대사에 관한 통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 권의 내용이 근년의 일본 역사학계의 동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 시리즈의 특색의 하나로서 동아시아, 식민지의 문제가 중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전10권의 제목과 저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막말(幕末)•유신  (이노우에 카츠오)
  ② 민권과 헌법  (마키하라 노리오)
  ③ 일청(日淸)•일러 전쟁  (하라다 케이이치)
  ④ 대정 데모크라시  (나리타 류이치)
  ⑤ 만주 사변으로부터 중일 전쟁에  (카토 요코)
  ⑥ 아시아•태평양 전쟁  (요시다 유타카)
  ⑦ 점령과 개혁  (아메미야 쇼우이치)
  ⑧ 고도 성장  (타케다 하루토)
  ⑨ 포스트 전후 사회  (요시미 토시야)
  ⑩ 일본의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미야지 마사토)
현재까지 ①에서 ⑧까지가 간행되었고 ⑨와 ⑩은 미간이다 (나 자신은 ①에서 ⑦까지는 입수해 읽을 수 있었지만, ⑧은 한국의 서점에서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읽지 못했다는 점을 양해하기 바란다).
 
 2) 일본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
  10권의 구성을 보면, 큰 구성 자체는 종래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단지 1945년 이후의 시기에 3권이 충당되어 있어서 전후의 시간적 길이가 실감된다. 이 시리즈의 전체의 경향으로서 내가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내재적인 시각의 중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이다. 메이지 유신의 전제로서 전통 사회의 높은 역량을 강조하는 입장이 천명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이 저자의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도 메이지 유신 연구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고 생각되는데, 종래 밖으로부터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온 전후 개혁을 취급한 ⑦의 저자의 말은 나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즉 ⑦의 저자는 전후 개혁에 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이해를 점령국 (실제로는 미국)에 의한 개혁의 성공담이라고 비판했다.
점령하에서의 일련의 개혁 (군부의 해체, 재벌의 해체, 농지 개혁, 교육의 민주화, 그리고 가장 큰 개혁으로서의 일본국 헌법의 제정 등)을 안으로부터의 시점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저자의 입장에 현재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의문도 적지 않다. 또 하나의 특색으로서 민중의 동향에 큰 관심이 기울여져 있다는 점이다. 추상적, 이념적인 민중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민중상을 그리는 작업을 통해서 복잡한 민중의 실체를 구명하고 있는 점은 근년의 일본사 연구의 성과를 근거로 한 귀중한 것이다. 이러한 특색을 전제로 다음에 동아시아 문제, 식민지 문제에 관한 이 시리즈의 특색에 대해 검토해 보려고 한다.

3) 동아시아와 식민지 문제에 관한 인식
식민지 문제의 중시는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 시리즈의 특색으로서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의 내용은 어떠할까? 우선 ①부터 ④까지에 있어서는 권 마다 하나, 혹은 두 개의 장이 동아시아, 식민지의 문제에 할당되고 있다.
한편 ⑤로부터 ⑦까지의 세 권에서는 동아시아나 식민지의 문제가 독립한 장으로서 다루어지지는 않고 ④까지와는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1931년의 「만주 사변」 이후를 대상으로 하는 ⑤와 ⑥에서는 중국이나 구미, 또한 소련과의 관계가 대외관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중일 전쟁이나 제2차 세계대전이 주된 테마가 되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⑤의 저자가 솔직하게 말하고 있듯이, 식민지의 문제는 거의 기술되지 않았으며 (⑤ 241페이지). 또한 ⑥에서는 제3장 ‘전국의 전환’의 3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의 현실’이라는 표제로 전쟁 동원 체제나 강제 연행, 황민화 정책 등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을 뿐, 한국이나 대만에 있어서의 사회 변용이나 그 의미 등에 관계해 전혀 언급이 없다.
따라서 식민지의 문제를 중시한다고 하는 이 시리즈의 캐치프레이즈는 용두사미에 끝나 버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째서 이러한 현상이 생긴 것일까?
⑦은 이 시리즈  중에서 가장 개성적인 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저자 주장의 핵심적인 부분은, 전시하에 존재한 네 개의 정치 조류 (국방국가파, 사회국민주의파, 자유주의파, 반동파) 가운데 패전 전에 자유주의파가 주류가 되어 있었던 것이 전후 개혁의 가장 중요한 전제였다는 데에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은 식민지와 지배 지역을 가지는 제국이었으며, 총력전 체제란 이러한 지역을 불가분의 구성요소로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자유주의파는 식민지나 지배 지역의 문제를 포함해 어떠한 전략 구상을 갖고 있었는가? 저자가 보여주는 자유주의파의 정책은 일본 국내에 한정된 것이어서, 식민지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총력전 체제화에 의해서 일본에서는 「사회 관계의 평등화, 근대화, 현대화가 진행되었다」라고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식민지나 지배 지역과의 관계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시야에는 이러한 문제가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이다.
전쟁 책임이나 식민지 지배 책임의 문제는 벌써부터 표면화된 것이며, 냉전 체제의 종언과는 무관하다. 저자의 말투로는,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은 냉전 체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으로서는 책임을 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고 하는 주장과 같이 들리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식민지 지배의 「종언」에 관한 인식에 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 「시작」에 관해서는 어떨까? ①, ②, ③에 있어서의 이해를 다음에 검토해 보자.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①에서 ‘「탈아시아」로의 길’, 그리고 ②에서 ‘내국 식민지와 「탈아(脫亞)」로의 길’, 이라고 해서 두 명의 저자가 닮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특히 거기서 「길」이라는 말이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명의 저자가 대단히 닮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마 우연한 결과이며, 「길」이라고 하는 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표제는 두 명의 저자만의 역사 이해라기보다도 일본의 역사 연구자들에게 널리 공유되고 있는 이해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탈아시아 혹은 탈아(脫亞)라는 말이 ①, ②권에 걸쳐서 사용되어 있는 것은 탈아가 긴 과정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왜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탈아의 방향이 목표로 설정되었는지,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어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선택되었는지 등, 탈아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들이 이 시리즈를 읽어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탈아가 도착한 결과가 「대동아공영권」이었다는 것은 근대 일본의 최대의 아이러니이지만, 탈아가 확실한 이념에 의거해서 선택된 방향이 아니고, 따라서 대만이나 한국을 식민지 지배하게 되었는데도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에 관한 인식이 결락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①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 사회의 높은 달성, 특히 민중의 그것을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높은 달성과 동아시아에 대한 팽창주의, 침략주의가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탈아라고 하는 방향이 최초부터 자연스러운 존재로서, 즉 「길」로서 있던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현재 일본국민 사이에서는, 1937년부터의 중일 전쟁, 혹은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1931년의 「만주 사변」으로부터 1945년의 패전에 이르는 역사가 잘못이었다고 하는 점에 관해서는 거의 합의를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1931년 이전의 일본과 동아시아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있다.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대일본국 헌법의 제정에 이르는 국민 국가의 형성 과정, 그것을 이은 제국주의 체제의 형성이라고 하는 일련의 과정은,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의 과정이기도 했는데,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많은 국민은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현재도 계속 되고 있는 「역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1931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일본의 근대사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부터 다시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입장에 설 때, 위에서 검토한 시리즈 일본 근현대사도 종래의 틀을 기본적으로 답습한 것으로서, 21세기를 전망하는 통사로서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3. 새로운 일본 근현대사상을 위해서
그러면, 지금까지의 일본 근현대사상을 근본적으로 고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오늘의 심포지엄은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하는 장소는 아니기 때문에 핵심적인 문제에 한정해서 극히 간략하게 사견을 피력하는데 머무를 수밖에 없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근현대사를 재검토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결하며, 적어도 일본에서의 무사 정권의 성립 문제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14 세기이다. 현재의 일본사 연구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아미노 요시히코는, 몽골 제국의 일본 공격으로부터 1392년의 남북조 통일에 이르는 과정을 일본사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파악하는 견해를 주장했다. 이 견해에 나도 찬성하지만, 아미노의 주장에서 빠져 있는 것은, 이 일본사의 결정적 전환이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일본의 주변적 지위를 결정 지었다는 시점이다. 14 세기는 동아시아 규모로 보면, 몽골 제국이 붕괴하는 가운데, 명, 조선, 베트남의 려조 등, 새로운 왕조가 일제히 등장한 세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왕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은 유교, 특히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서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념에 알맞는 국가 체제, 사회체제의 건설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남북조 통일을 획기로 하는 무사 정권의 확립이라고 하는 일본의 움직임은 극히 특이한 것이며, 동아시아적인 동시대성이 결여된 것이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14 세기의 역사에서 한 가지 더 놓칠 수 없는 일은 류큐가 동아시아 세계의 주체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이 마주보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이 14 세기를 획기(劃期)로 형성, 확립되어 온 동아시아의 왕조 국가 체제였다. 이 왕조 국가 체제는 물론 여러 가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고, 특히 19 세기가 되면 그 모순이 한계에 이르게 되었지만 토쿠가와시대의 일본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도 이들 왕조 국가 체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결정적으로 부족했다. 이것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나 근대의 동아시아 침략이라고 하는 노선을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견해는, 지금까지의 일본사상의 근본적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문제와 정면에서 마주보는 노력이 없으면 21세기에 있어서의 일본과 동아시아와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상기 시리즈의 ④에 대해서 이와나미 서점의 편집자는 「세기 전환기를 유연하게 (しなやかに)」그려낸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와나미 서점 홈 페이지), 일본의 근현대사는 「유연하게」그릴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발표 3] 동아시아사의 인식과 교육--재한(在韓) 중국 학자의 견해
런팡(任放, 역사학 박사, 중국 우한대학(武漢大學) 교수, 한국 성균관대학 객원교수)

지리적으로 동아시아란 아시아 동부 지역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중국, 몽골, 북한, 한국, 일본의 5개국이 포함되며, 그 핵심은 한중일 세 나라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사'는 아시아 동부 지역의 역사로, 중국, 일본, 한반도 전체의 역사이다. 즉 개별 국가의 역사가 아니라 지역사인 것이다.

첫째, 동아시아는 역사적 개념이다.
동아시아에 서구 식민주의의 손길이 뻗기 이전, 동아시아는 이미 하나의 문화적인 실체였으며 인류의 역사 과정을 구성하는 하나의 문화적 단위였다. 지리적 대발견 이전의 동아시아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전파된 한자문화권이며, 중화 문화를 핵심적 가치로 하는 화이(華夷) 질서 또는 조공(朝貢) 체계라고 볼 수도 있다. 중국의 한자, 유교, 법령, 제도, 문물, 풍속 및 중국화된 불교는 주변 각국에 문화의 척도로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다시 말해, 정치적인 조공(朝貢)과 책봉(冊封), 경제적인 유무상통(有無相通), 군사적인 우호국 보호, 외교적인 종범(宗藩) 질서, 문화적인 전파 등 모든 면에서 동아시아는 통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동아시아는 서구의 담론이다.
동아시아에 관한 여러 해석 가운데, 동아시아가 서구의 담론이라고 보는 관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동아시아인에게 지리적 대발견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동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이고 그 이후의 동아시아는 서구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서구의 동아시아가 되었고, 서구 문명 확장(식민화)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으며, 서구 중심적인 담론이 되었다. 이는 곧 서구의 기준이 보편적인 가치가 되어, 시비(是非)와 고하(高下)를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로서, 문명과 야만 그리고 선진과 낙후를 가늠하는 유일한 척도로서, 서구와 비서구(동아시아 포함)라는 이분법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셋째, 동아시아는 현대 어휘이다.
미디어가 고도로 발달한 정보 혁명 시대에, 역사로서의 동아시아와 서구 담론으로서의 동아시아는 모두 동아시아인의 문화 인식으로 내재화되었다. 이는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중요한 표지로, 일상생활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는 현재 동아시아인의 현실인 동아시아가 되어, 그들이 살고 있는 현대 사회를 일컫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넷째, 동아시아는 하나의 분석 도구이다.
학술 연구 층위에서 동아시아는 일종의 분석 도구로 기능한다. 동아시아는 일종의 개념으로서, 일련의 개념들이 학문의 틀을 구성한다면 역사는 이 학문의 틀 속에서 해석되며, 동아시아사 역시 이 학문의 틀 속에서 인지된다. '동아시아'를 하나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면 '동아시아'는 역사학자의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며, '동아시아사'는 구축의 근거를 잃게 된다.

동아시아사의 역사 기술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첫째, 연구방법, 즉 방법론을 보자.
둘째, 학문 체계, 즉 해석의 틀을 살펴보자.
셋째, 학술적 규범 또는 학술적 금기는 무엇인가.

동아시아사의 인식과 교육의 측면에서 우선 다음의 두 가지 작업이 중요하다. 첫째, 완전히 새로운 동아시아사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둘째, 동아시아 각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 교육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는 대학 역사 교육, 중고등학교 역사 교육, 동아시아사에 대한 매스미디어의 홍보 등이 있다.

동아시아사의 인식과 교육을 추진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업에 힘써야 할 것이다.
1. 동아시아사와 동아시아학, 동아시아사와 각국사, 동아시아사와 세계사, 동아시아사와 기타 전문사, 동아시아학과 다른 관련 학과 등 학제간 대화
2. 학계와 정부의 대화
3. 학계와 대학생, 중고등학교, 초등학생의 대화
4. 학계와 대중의 대화
5. 동아시아 내부의 대화
6. 동아시아와 세계의 대화(서구뿐 아니라, 동아시아도 서구도 아닌 나라까지)

Ⅱ부. 동아시아사 교재와 동아시아사 수업

[발표 1] 동아시아사 교육과정과 교과서 개발방안 -동아시아사의 구조적 이해를 위한 시론-
김택민(고려대)

조공-책봉 관계는 중원왕조가 우세한 힘으로 위압해서 성립한 것이 아니고, 조공국과 피봉국의 이해가 합치되어 맺어지는 의례적인 외교형식일 뿐이다.
중원에서 특히 유교와 율령이 출현한 것은 그 지역의 국가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중원은 대평원에 인구가 밀집되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역사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 중에 강력한 전제군주가 출현했고, 그 군주의 법으로 율이 제정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지러운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여러 가지 주의주장이 제기되었으며, 그 가운데 후대까지 생명력은 갖고 중국 및 동아시아의 지도 이념이 된 것이 유교이다.
율령과 유교는 반란과 대동란이 반복되는 중원의 환경에서 당의 율령으로 진화되었다. 그것은 황제 지배체제를 보증하고, 치밀한 신분차등주의를 골격으로 하는 것이다. 한반도나 일본의 경우는 율령 형식을 빌려 법을 제정했지만 역사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고유법을 근간으로  법을 제정했다.
유교와 율령은 한반도와 일본으로만 전해졌지만, 이른바 조공-책봉 관계는 초원의 유목지역을 포함하여 이루어졌다. 유목 정권과는 경제적 관계가 주류인데 이는 중원왕조가 유목세력의 군사적 위협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한반도와 일본과는 문화적 관계가 주였고, 대신 경제적 관계는 미미했고, 군사적 충돌도 드물었다.
그 동안 우리는 선진 지역인 중원에서 성립한 유교․율령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강대한 중원 왕조가 주변의 약소 왕조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는 방식으로 동아시아사의 구도를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선진․강대와 후진․약소라는 도식적인 구도만으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유교와 율령이 먼저 성립했으니 중원이 선진인 것은 분명하고, 중원왕조를 중심으로 조공-책봉 관계가 성립했으니 중원이 중핵적인 위상을 차지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유교․율령은 중원의 역사․지리적 환경의 소산이고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특별히 선진적이라고 할 만한 사회가 구현된 것은 아니다. 조공-책봉 관계도 중원왕조가 우세한 힘으로 위압해서 성립한 것이 아니고, 조공국과 피봉국의 이해가 합치되어 맺어지는 의례적인 외교형식일 뿐이다.
동아시아사는 중원을 중핵으로 하고, 북쪽의 초원과 서쪽의 산지에 유목 세력이 있고, 동쪽에 농경사회인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남쪽에 베트남이 있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전개되었다.    동아시아사의 문화적 특성 내지 동질성을 보여주는 유교, 불교, 율령은 분명 중원에서 성립하였고, 그것이 한반도의 여러 왕조들과 일본의 고대 왕조들, 그리고 고려와 조선, 11세기 이후의 베트남에 전해져 이 지역의 법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원에서 특히 유교와 율령이 출현한 것은 그 지역의 국가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중원은 대평원에 인구가 밀집되어 일찍부터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역사 환경이 조성되었다. 일찍부터 권력 투쟁이 격렬했고, 제후국들 사이의 전쟁은 계속 이어졌으며, 폭력이 만연하여 대부분의 민들은 최소한의 생존권도 보장되기 어려웠다. 이런 환경에서 강력한 전제군주가 출현했고, 그 군주의 법으로 율이 제정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지러운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여러 가지 주의주장이 제기되었으며, 그 가운데 후대까지 생명력은 갖고 중국 및 동아시아의 지도 이념이 된 것이 유교이다.
율령과 유교는 반란과 대동란이 반복되는 중원의 환경에서 당의 율령으로 진화되었다. 그것은 황제 지배체제를 보증하고, 치밀한 신분차등주의를 골격으로 하는 것이다. 한반도나 일본의 경우는 율령 형식을 빌려 법을 제정했지만 역사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고유법을 근간으로 하는 법을 제정했다. 유교의 경전도 선별적으로 수용했을 뿐이다.
유교와 율령은 한반도와 일본으로만 전해졌지만, 이른바 조공-책봉 관계는 초원의 유목지역을 포함하여 이루어졌다. 이런 방식의 외교관계는 중원왕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뚜렷하게 구별되는 두 가지 다른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즉 유목 정권과는 경제적 관계가 주류인데 이는 중원왕조가 유목세력의 군사적 위협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한반도와 일본과는 문화적 관계가 주였고, 대신 경제적 관계는 미미했고, 군사적 충돌도 드물었다.


[발표 2] 한국 대학의 동아시아사 교육-그 역사와 현실
김태승(아주대)

導論 : 왜 지금, 동아시아사 교육을 말하는가
역사연구/교육은 그 대상지역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대상공간을 제한하고 그에 대한 명칭을 부여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지역의 설정은 설정하는 주체의 주관적 해석의 범주 안에서 즉 주체가 서있는 지점에서 조직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시간과 관련지어 짐으로써 역사성을 획득하게 된다. 지역개념은 특정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인식방식 그리고 그러한 지역개념을 주장하는 자의 힘의 크기에 의해 설정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동아시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동양 또는 동아시아 지역개념의 역사성

1-1. 동양과 서양
그런데 우리가 동아시아라는 역사지역을 연구나 교육영역에서 ‘발명’하려 한다면, 우선 ‘동양사’ 더 나아가서 세계사라는 역사공간을 재구성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모호한’ 동양이라는 지역설정이 나름대로 언어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모호한’ 서양이라는 지역개념 때문이었다. 서양이 존재하는 한, 언어적으로 동양이라는 표현은 서양에 대해 상보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었으므로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유용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관은 세계를 동양과 서양의 결합체로 단순화하고, 기타의 세계를 인식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현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사실상 동양을 아시아로 대체하고, 아시아는 다시 몇 개의 문화권으로 재편성하고 서양에 대칭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특정지역에 한정시켰던 종래의 동양사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을 바로 아시아로 대체할 수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1-2 아시아는 가치중립적인 대체 지역개념이 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동양을 보다 가치중립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시아, 동아시아라는 지역개념 역시, 사실은 식민지 경험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었다.
1940년대의 ‘폭압적 일제의 지배체제’ 아래에서 태평양전쟁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아시아는 구미와 대립되는 공간이며 그 중심에는 일본이 있다는 사고방식에 적응해 있었으므로, 해방이 되었다고 동양을 버리고 아시아나 동아(시아)로 이행하는 데는 얼마간의 거부감이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식민지 경험을 통해서 지역개념에 대한 언어적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으므로, 동양이건 아시아건 어떤 고통없이 그것을 우리 학문체계에 정착시키는 것은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단위로서의 아시아사는 현실적으로 성립되기 어려웠던 것이고, 개화기 이래로 사용되어왔다는 점에서 오히려 저항감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동양(역시 수입용어였으나)이라는 지역개념에 기초한 연구와 교육과정의 설계가 진행되게 되었다.

2. 동양사 교육과정의 변천

2-1 원형
그러면 대학의 역사교육 속에서 동양사교육은 어떻게 형성되어왔는가.
早稻田 대학의 경우 사학과 교육과정은 국사(일본사), 동양사, 서양사의 3분법에 의해 구성되어 있었으며, 京城帝國大學의 경우 역시 기본적으로는 3분법을 채용했으나, 다만 국사(일본사), 동양사, 조선사로 전공이 나뉘어져 있었다. 해방직후의 서울사대, 연세대, 고려대의 교육과정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말하자면 해방직후 한국의 동양사 교육과정은 거의 식민지 시대의 교육과정을 참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한국 대학에서의 동양사 교육과정을 포함한 역사학 교육체제의 원형이 되었다.

2-2 변용과 지속-오늘의 동양사 교육과정
중등교육과정에서 동아시아, 서아시아, 인도·동남아시아, 이슬람세계, 서아시아 등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음에 비해 대학교육과정에서는 아직 지역개념의 사용에 대해 확실한 결론에 도달해 있지 못하며, 교육체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도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는 교수들의 교육체계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과 함께 다음의 몇 가지 현실적 요소가 작동하고 있다.
첫째, 대학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들의 연구영역이 거의 특정국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문후속세대를 육성하는 동양사 교수들에는 중국사 전공자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뒤를 이어 일본사 연구자들이 조금 나오는 정도이며, 다른 지역이나 국가의 역사를 연구하는 전공자를 배출하는 대학은 거의 없다. 그것은 동양이라는 이름을 내어 건 교과목의 수업내용이 사실은 중국사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잘 나타나 있다.
둘째, 교육 대상지역 명칭의 설정에서 특별한 의식없이 동양과 아시아를 혼용한다. 서울대학의 다음과 같은 강의 요목을 보면 그 점이 보다 분명해 진다.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100.137 동양사학입문
아시아를 구성하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단순한 사실만이 아니라 동양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집중 탐구한다. (밑줄 인용자).

이 강의 요목에 비추어 보면 사실상 아시아는 여러 지역사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시각은 동양사를 대상으로 한다는 기묘한 서술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도 아시아는 지역명칭으로 동양사는 학문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양사는 때로는 중국사로 해석되다가, 때로는 아시아사로 치환되기도 하는 것이다.
셋째 그러나 많은 대학에서 지역사의 개념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확대되어 나갈 것으로 예측된다. 상당수의 대학에서 동아시아라는 지역 명을 교과목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일부대학(연세대학과 비교적 폭넓은 교수요원을 확보한 서울대학이 두드러진다)에서 아시아 전역으로 지역사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3. 동아시아사 교육-준비가 되어있는가?
3-1 분과영역 간의 소통확대와 교수요원의 문제
대학의 역사 교육과정에서 제일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각 분과영역 간의 소통의 부족이다. 개인적 영역에서는 능력에 따라 중국사 전공자가 한국사나 일본사나 몽골사 등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교육과정이나 운영에 있어서는 협의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공교육영역의 해체를 수반할 동아시아사 교육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중/일 삼국사를 통합한다는 점에서, 교수들 간에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지역사의 범주 설정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학문적 성찰이 필요하고, 협동강의 등, 교육방식의 개선을 통한 적극적 교육과정 개발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교수요원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문제이다. 서울의 몇 개 대학을 제외한 상당수의 대학에서는 전공의 존폐 자체가 위협이 되고 있으므로 본래의 전공영역의 외연을 확장시켜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마도 학회차원의 협력을 통해 적절한 교재를 개발하고 참고자료를 소개, 제공하는 체제를 만들어낸다면 대안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지만, 한국학회의 성격이나 연구지향성이 강한 교수들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3-2 학생들의 수요와 교육 자료의 문제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역사학에 대한 학생들의 수용성 문제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과잉이라고 할 정도이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저조하다. 사학전공에 들어온 학생들조차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나 세계지리를 수강한 바가 거의 없었으며,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 역사나 지리에 대한 지식은 󰡔먼 나라 이웃나라󰡕 수준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에서의 동아시아사 교육은 구체적 역사현상을 매개로 귀납적으로 진행되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학생들이 처한 현실에 덧붙여서, 교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또 다른 문제는 학부수준의 교육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육 자료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아직은 학계가 이론적, 전문적 연구에 집중하고 있어서 학부 수준에서 학생들에게 읽힐만한 교육 자료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결론-대책과 남는 문제들
각 대학에서는 이미 교육과정의 개편을 시작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사 형태의 지역사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입장에서 의미있는 동아시아사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첫째, 기존의 대학의 동아시아사 교육에서 사실상 분리되어있는 한국사를, 지역사의 범주 안으로 이끌어 오는 사학과 교육체제 전반의 개편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사/동양사/서양사의 3분법적 교육체제의 개편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둘째, 교육체제의 개편이 전면적인 문제여서 어렵다면 우선 비교사적 과목들을 개발하여 시야를 점차 확산시켜 나갈 수 있는 노력을 진행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일부에서 논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삼국지’적 역사수업이라도 과도기적으로 개별 강좌들 안에서 시도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학회 등, 교수들이 수평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동아시아사 관련 교재와 교육자료 개발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개별 대학에서의 동아시아사 교육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넷째, 교육부도 중등교원무시험 자격검정을 위해 이수해야할 과목명의 설정에서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는 식민지 시대의 어둠을 대학의 역사교육체제에서 벗겨내고, 주체적 역사교육의 공간을 확보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사 교육은 앞으로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고, 그 범주 설정에 대해서도 첨예한 의견의 대립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교육영역의 설정 자체가 이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가 아니겠는가.


[발표 3] 한국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들의 동아시아사 교육 인식
황지숙(전국역사교사모임, 신림중)

1. 설문 조사의 목적, 내용, 방법
2012년부터 고등학교 선택과목의 하나로 개설된 동아시아사 과목을 직접 가르칠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들의 인식을 알아보고, 설문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사 교육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고 현재 담당하고 있는 과목에서 관련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재구성하고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기회를 갖고자 하였다.
설문 조사의 내용은 크게 동아시아사 교육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 중요한 시각과 목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 마지막으로 선택과목으로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여부를 묻는 것으로 구성하였다. 설문 응답자는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활동하는 교사 13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2. 설문 결과를 통해 본 역사교사들의 동아시아사 교육 인식
첫째, 대다수 교사들이 동아시아사 과목 신설을 통한 동아시아사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나, 교육과정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추상적인 교육과정을 통해서는 수업을 구성하는데 직접적인 아이디어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교사들은 아무래도 교육과정보다는 수업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이런 경향은 거의 대부분 교사들이 동아시아사 관련 연수나 자료 개발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지금 시점에서 동아시아사를 선택할 것인지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선택하지 않겠다고 응답한 교사들 역시 다른 과목을 통해서 동아시아사 교육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동아시아사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모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주변국과의 역사 갈등과 분쟁이 동아시아사 신설 배경의 하나가 되었듯이, 교사들은 동아시아사 과목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다양성을 탐구하고 타자 이해를 통한 문제 해결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자민족중심주의를 넘어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과 함께 동아시아라는 광역 공간에서 관계와 교류의 시각, 평등·평화·공존의 시각을 동아시아사 교육에서 중요한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임진왜란’, ‘6·25전쟁’과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러한 시각이 드러났음을 확인하였다.
셋째, 동아시아사 교육과정에 대하여 교사들은 국사, 세계사, 지리 등 다른 과목과의 중복성 문제와 우리의 연구 성과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는 앞으로 교과서 개발시 앞으로 8, 9학년(중학교) 역사와 10학년(고등학교) 역사와 함께 계열성 문제를 고민해야 하며, 한국문화사, 세계역사의 이해 또는 지리 영역 등 다른 선택과목에 대해서도 내용 검토가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연구 성과의 문제는 학계의 협력적인 연구 작업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각국 각 시대 전공자들이 시기별로 연구팀을 만들어 동아시아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주체들의 역사와 문화를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엮어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번 설문 조사를 통해 역사인식 뿐 아니라 역사지식의 생산과 유통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분은 교사들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동아시아사가 정체성을 가진 과목으로 연착륙할 수 있도록 우리 학계의 연구 성과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관련된 나라의 자료를 쉽게 구해볼 수 없고 구한다 하더라도 언어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다른 나라의 연구 성과 및 자료가 신속히 번역되고 공유될 수 있는 협력체제가 갖추어지기를 바란다.


[발표 4] 역사분쟁과 ‘동아시아사’ 수업
마루하마 에리꼬(丸浜江里子)
한중일삼국역사부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편집위원
 ‘스기나미 교육을 생각하는 모두의 모임’

들어가며

저는 동경의 중학교에서 1974년부터 26년간 사회과를 가르치고 2000년에 퇴직했습니다. 퇴직하던 해에 살고 있는 동경도 스기나미구(杉並區)에서「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교과서가 채택될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교과서문제에 관계했습니다. 2001년은「새역모」교과서의 스기나미구에서 채택을 저지했지만, 2005년은 역부족으로 채택되어 버렸습니다. 다음 채택은 스기나미 주민의 힘을 모아 어떻게 해서든 막아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2005년 5월에 간행한 한중일 3국 역사부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작성에도 참가, 한국과 중국을 방문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왔습니다. 현재는 대학원에서 현대사를 연구하면서 스기나미 주민으로서 시민운동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교사와 시민운동의 경험 속에서 느낀 것, 지금의 스기나미의 상황도 언급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1. 교사로서의 경험으로부터 】
먼저, 3가지의 역사분쟁에 관련해 교사 시절에 경험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임진·정유왜란(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
저는 1992년 여름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 해는 임진·정묘왜란 4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서울 시내의 쇼윈도에 거북선이 진열되고 텔레비전을 틀면 이순신의 해전 장면 등이 매일 방송되어 일본에서는 교과서 안에서 밖에 언급할 기회가 없는 사건을 한국에서는 계속 전하고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의 침략이 많은 민중을 죽이고, 문화재를 약탈, 이 땅에 큰 손톱자국을 길게 남겼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400년 이상 전의 전쟁의 실태와 저항을 계속 말하고 있는 한국과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지만 침략의 실상이 전달되지 않는 일본의 격차를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알 수 있어, 일국사적인 서술방식이 아니라 한일 양국에서 사실을 바라볼 필요성, 역사분쟁을 동아시아 규모에서 배워 가야 하는 중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청일전쟁
 전전(戰前)의 중학교 교과서(『중학국사통기(中學國史通記)』1938년판)은 청일전쟁의 시작을
  「메이지(明治)27년 조선에 동학당의 난이 일어, 국내분란과 청국이 즉시 병사를 보내 조선을 속국으로 삼으려 하여 그 폭정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이르러 우리나라는 청국에 선전포고하고 드디어 메이지27•28년에 전몰시켰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새역모」교과서와 매우 닮았습니다. 그러나 「새역모」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일본인의 인식도 이와 같은 인식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도 언급하겠지만 근현대사 교육을 경시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지금의 어른들의 역사학습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기 정도로 끝난 것이 대부분으로 청일전쟁이라는 이름이 알고 있어도 국민 수준에서의 인식은 전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에 중학생이었던 제 자신, 청일전쟁에 대해서 배운 기억은 청과의 전쟁에서 이겨 배상금과 타이완을 얻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을 전쟁터로 한 일이나 피해양상을 배웠던 기억은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오류를 깨달은 것은 씨치에린(許介鱗氏, 타이완)씨의 논문에 의해서였습니다. 씨씨는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원조」(「日淸戰爭における日本援助」)」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중국은 …전쟁에 졌기 때문에 일본에 배상금 2억냥(요동반도 포기와 더불어 3000만냥 추가)를 지불당했습니다. 2억냥은 중국의 년수입에 2배에 상당하고 더욱이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서는 3년 이내에 지불을 끝내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패전은 직접적으로는 인민에 대한 잔혹한 세금징수로 민중의 분노를 부추겼고 대외적으로는 외채가 높이 쌓여 열강에 대한 종속화를 촉진시켰습니다. 」

논문을 읽고 「청으로부터 얻은 배상금으로 일본이 산업혁명을 달성했다」고 일본에게 유리한 것만을 가르쳐 왔던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배상금 지불을 위해 중국의 민중이 감내한 고난을 생각하는 상상력이 결여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의 갑오농민전쟁, 일본군대의 조선왕궁점령, 주된 전쟁터는 조선이었다는 것, 일본의 타이완지배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늦은 걸음이지만 조금씩 역사인식을 넓혀 왔습니다. 역사분쟁은 동아시아 수준에서 배우지 않으면 실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청일전쟁은 그 전형적이 예로 이 외에도 동아시아라고 하는 전개 속에서 파악할 것으로 보다 깊은 인식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국의 일을 냉정하게 배우는 것은 어려운 점도 있지만 학습을 하는 가운데 연대감, 상상력이 길러진다면 큰 가능성이 있는 것이겠죠.

■ 1982년 역사교과서논쟁에서
 일본은 패전 후, 연합군에 점령당했지만 천황이나 정부를 남겨둔 채 간접통치였기 때문에 정부 문부성(현재는 문부과학성)과 함께 전전(戰前)의 영향이 짙게 남았습니다. 교과서는 국정에서 검정으로 되었지만 교과서검정을 강화해 전쟁에서의 가해 사실을 쓰지 않도록 전쟁의 피해도 적게 쓰도록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미국에 종속하면서 재군비노선을 선택한 자민당정부는 전쟁의 실태, 특히 아시아에서의 가해를 국민이 배우는 것을 계속 억눌러왔습니다. 이런 흐름에 저항해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씨는 1965년부터 32년간에 걸친 교과서재판서소송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역사학자, 교육관계자. 시민이 협력해 검정을 위헌, 위법이라는 판결을 몇 번이나 쟁취하고 검정에 일정한 제동을 걸어 왔습니다.
가장 크게 제동이 걸었던 것은 1982년의 「침략」을「진출」로 검정에서 바꿔 쓰게 하는 등 전쟁책임을 감추려고 한 정부 문부성에 대한 한국, 중국 등의 항의였습니다. 그 결과 「근린제국에 대한 배려」가 검정기준에 담겨지는 외교결착이 꾀해져 그 기준으로 인해 대부분의 교과서에 가해사실이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동경대공습이나 원폭 등 일본인의 전쟁피해가 중심이었던 평화학습을 반성하고 일본의 가해성을 전하는 평화학습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완수했습니다. 저는 회한(悔恨)의 심정으로 자신의 전쟁범죄를 얘기하는 전 일본군 병사나 싱가폴의 어떤 분을 교실로 초대해 중학생에게 전쟁에 대해서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진실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라는 아시아 국가들로부터의 항의가 일본의 역사학과 교육을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1997년판 모든 역사교과서에는 「위안부」, 「남경학살」이 실렸습니다. 「새역모」는 이와 같은 흐름에 대한 우익세력의 반격이었습니다.

【 2.『미래를 여는 역사』편집 경험으로부터 】
『미래를 여는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처음에는 가해국 일본과 피해국 한국 중국이라는 구도로 일본인으로서 가해의 역사를 등에 짊어진 것 같아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든지 격렬한 의견대립으로 더 이상은 삼국 부교재를 만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청일전쟁, 중일전쟁, 원폭투하, 조선전쟁을 둘러싼 기술 등에서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일국사의 범위에서는 자명한 것으로 생각했던 역사인식이 다른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국중심의 관점이었다고 깨닫는다든지, 역으로 타국의 인식처럼 느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삼국의 집필자간의 논쟁과 갈등 속에서 차이를 인식하면서 대립을 뛰어넘기 위한 지혜, 신뢰와 가능성을 배우고 자기 제 마음 속의 국경의 벽이 매우 낮아졌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미래를 여는 역사』가 힘겨운 토론을 거쳐 완성,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동아시아 수준에서의 학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3. 스기나미 주민운동 활동으로부터 】
 마지막으로 스기나미구(杉並區) 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스기나미구는 「새역모」교과서를 채택시킨 야마다 히로시(山田宏)구청장이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을 독재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본래 시민참가의 전통을 가진 지역에서 교묘하게 비판세력을 배제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수법을 사용한 우익적인 「국가를 위한 인재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료야간수업(夜スペ)」라고 하는 이름으로 공립중학교를 사용해 저녁에 열리는 학원은 수험학력 향상을 바라는 주민요구에 따른 것 같지만 학교에 학원을 끌어들인 영향은 아이들의 마음이나 인간관계, 교사의 의욕이라는 면에서도 큰 문제입니다. 운영주체인「지역지원본부」는 예전부터 공중분해라는 소문도 돌고 있으며 겉모습과 실상은 다르다는 것을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알려드립니다.

【 결론 】
전쟁이라는 분쟁은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되지만, 학습 논쟁을 통해서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들의 교류, 연대가 깊어지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습득할 수 있다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시작한 동아시아 수업이 동아시아 교육의 하나의 모델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실 것을 기대하며,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Level. admin0%
  出会いf  09-03-26 17:43
Level. --0%
<A href="http://blueandyellow.blog22.fc2.com/">SEX</A>できるサイト<A href="http://pyridoxiamine.blog34.fc2.com/">逆援助</A>専門の出会い<A href="http://gyakuenjyoyattemita.blog10.fc2.com/">逆援助</A>でセレブ女性とH<A href="http://douteiget.blog102.fc2.com/">童貞</A>喪失も可能<A href="http://hurinxxx.blog19.fc2.com/">不倫</A>がしたい人にもおすすめ<A href="http://hikikomory.blog21.fc2.com/">セックスフレンド</A>もできます<A href="http://tk-sehure.eroch.jp/">セフレ</A>がほしい人におすすめ<A href="http://tk-sexf.eroch.jp/">セックスフレンド</A>がみつかるサイトです<A href="http://tk-okusan.eroch.jp/">奥さん</A>と不倫できる<A href="http://tk-sex.eroch.jp/">SEX</A>できる優良出会い初心者でも<A href="http://tk-gyaku.eroch.jp/">童貞</A>でも出会える<A href="http://tk-fp.eroch.jp/">不倫</A>関係希望女性多数<A href="http://tk-gyakuen.eroch.jp/">逆援</A>でも大丈夫です。<A href="http://deai.s-seo.com/">出会い系</A>サイトはこちら。<a href="http://esankou.blog121.fc2.com/">逆援助交際</a><a href="http://mayumayu20.blog115.fc2.com/">人妻</a><a href="http://over30.14.dtiblog.com">熟女</a><a href="http://ouatij.blog98.fc2.com/">出会い</a>
  6yhgrth  10-03-25 19:42
Level. --0%
* 비밀글 입니다.
  황지연  21-06-16 18:52
Level. 158%
소나무잎을 세지 않을때는 사군자와 비무 할때를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많은 잎파리를 셀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사용했다. 그는 집에 가까워오자 누군가가
집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http://vmm789.com
  최근에 올라온 글들
  가장 많이 클릭한 글
 
학회소개   ../   관련사이트   ../   학회정관   ../   회원가입안내   ../   국토교통부 바로가기